JEAN-LUC COMOLLI AND JEAN NARBONI
CINEMA/ IDEALOGY/ CRITICISM
방송영화전공 3학기
이현정
과학적 비평은 그 범위와 방법론을 명확히 규정해야만 한다.
이것은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상황에 대한 자각과 학문의 범위에 대한 엄격한 분석 그리고 작업을 필요하게 하면서, 조건들과 작업을 완수하기 위한 특별한 기능들을 함의하고 있다.
Cahiers du Cinema에서 우리는 우리의 입장과 목표에 대한 전세계적인 분석을 실시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완전 무의 상태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분석의 조각들은 최근의 우연적이고 막연한 상태의 우리의 출판물들 (기사, 논설, 토론, 독자에 대한 회답, 편지) 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것은 우리의 독자들도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둘로 나눌 수 없는 비판적 실천과 그것의 장을 연결시키는 명료한 이론적 토대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프로그램화와 혁명적인 계획들 그리고 선언들은 그 자체들로서 종국을 맞기가 쉽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함정을 피하려고 한다. 우리의 목표는 우리가 하고 하고자 하는 것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고 있는 것,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드러내는 것인데, 이것은 현재상황에 대한 분석 없이는 불가능한 것들이다.
어디에?
a. 첫 번째로 우리가 처해있는 장소이다. Cahiers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우리가 같이 하는 일의 결과 중 하나는 잡지를 통해서 보여진다. 잡지라는 특정한 생산물은 누군가 그것을 쓰고, 누군가 그것을 출판해 내고, 그리고 누군가는 그것을 읽게 되는 특정한 양의 노동과 관련이 되게 된다. 우리는 이런 상품의 본성이 자본주의 출판계의 경제 시스템 (출판 양식, 발행부수의 범위 등등)속에서 공명정대하게 위치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여하튼, 시스템에 평행하는 유토피아적인 사고들로 길을 읽지 않았다면, 오늘날 다른 방식을 가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후자의 접근에 있어서 첫 번째 단계는 시스템을 무효화시킬 수 있는 호의적인 믿음에서, 도피하고자 시도하는 것으로부터 같이 있는 새로운 시스템은 언제나 거짓 전선이다. 사실 이것이 할 수 있는 전부는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사실 할 수 있는 전부는 거부하는 것이다.
(이상주의자의 순수주의)와 결정적으로 머지않아 그 자체로 모델화되는 적들에 의해 위험에 처해지게 되는 것이다. 이 평행주의는 오직 한 방향으로만 작동된다. 우리는 양방향으로 작동해야 된다고 믿는 반면, 이것은 상처 입은 자의 한 방향만을 건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무한대에서의 고속의 평행선의 만남의 위험성은 우리에게 차라리 유한대에서 서로가 평형상태로를 인정하면서 유지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주장하는 듯 하다.
이렇게 가정 했을 때,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의 상황에서 우리의 태도는 무엇인가?
프랑스에서 영화의 대부분은 책이나 잡지에서처럼, 지배적인 이데올로기 안에서 자본주의 경제구조에 의해서 생산되고, 분배된다. 사실, 엄격히 말해서, 아무리 진취적인 것을 채택해서 시도한다고 해도, 우리는 다 이렇다.
이런 상태이므로, 우리가 물어야 하는 질문은 이것이다:
어떤 영화, 책, 그리고 잡지가 자유롭게, 방해 받지 않는 문장을 쓴 이데올로기를 허용하며, 투명하게 전달하고, 선택된 언어로서 작용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떠한 시도가 그것을 다시 되돌리고, 반성하고, 그것들을 막아 냄으로써, 그 메카니즘을 '폭로해서 분명히 눈에 보이도록 할 수 있을까?
b.우리가 연기하고 있는 장소는 영화의 장이다.
(Cahiers는 영화잡지), 그리고 우리 연구의 분명한 목적은 영화의 역사이다. 그것이 어떻게 기획되고, 제조되며, 배분되고, 이해되는가 말이다. 오늘날의 영화는 무엇인가? 이것은 적절한 질문이다;
아니다. 전에 그랬을 법하게도: 영화는 과연 시네마는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이론과 지식의 실체가 현재의 공허한 개념과 말들을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해 진화해 나갈때까지 이론의 실체, 지식의 실체에 대해서 질문을 던질 수 없을 것이다.
영화잡지로서 질문은 역시 이것이다: 어떤 일들이 영화로 구성된 범위들에서 행해져야 하는가?
그리고 특히 Cahiers로서는: 이 부분에서 우리의 특별히 해야 하는 기능은 무엇인가?
우리를 다른 잡지와 구별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영화들.
영화는 무엇인가? 한편으로는 이것은 특별한 상품인데, 주어진 경제관계 시스템 속에서, 자본주의자에게는 돈으로 이해되는 생산하기 위한 노동과 연관 지어서 제조되고 있다. 이런 상황은 독립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던가, 'new cinema'를 지향하는 사람들 조차 똑같은 목적을 위해 특정한 수의 노동자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이것은 감독에게조차, 그가 Moullet던지 Oury던지 상관없이 영화노동자 분석의 마지막 단계로 적용된다.)
이것은 시장의 법칙에 의해 좌우되는 매표 수입이나, 계약 등의 교환가치를 지니고 있는 상품으로 변형이 된다. 다른 한편, 이런 시스템 속의 물질적 상품화의 결과로서, 이것은 또한 시스템상의 이데올로기적이 상품화가 되는 것이다.
프랑스의 경우 그것은 자본주의를 뜻하는 것이다.
어떤 영화관계자라도, 단지 자신의 개인적인 노력으로, 그의 영화의 생산과 분배를 관장하는 경제관계를 바꿀 수 있을 수는 없다. (내용과 형식상으로 혁명적인 영화로서 출발한 영화감독이 랄지라도 경제구조상의 순식간의 변화나 급진적인 변혁을 가져올 수는 없다는 것은 여러 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물론 훼손시키거나, 편향시킬지는 몰라도 그것을 무효화시거나, 그것의 구조자체를 심각하게 전복시킬 수는 없다. 고다르가 최근 자신은 이러한 구조 속에서 일하기를 그만두고 싶다고 언급한 것은 그 어떤 조직도 그가 피하기를 원했던 것들의 투영이라는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자금은 더 이상 프랑스에서 조달되지 않는다고 해도 영국, 이태리, 미국 등이 그것을 맡게 된다. 영화가 더 이상 독점적인 배급에 의해 시장에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또 다른 독점인 코닥의 필름으로 영화를 찍는 것이다. ) 왜냐하면 모든 영화는 경제시스템의 일부분일 수 밖에 없고, 영화와 예술이 이데올로기 상의 하나의 가지들이기에, 이데올로기의 시스템 안의 일부분일 수 밖에 없다. 어느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고, 마치 퍼즐조각들처럼 어디선가 할당된 일부분의 몫이 있는 것이다. 이 시스템은 그 본질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아니 사실은 그러한 이유 때문에 이 모든 조각들이 다 맞춰졌을 때는 그림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한 모든 영화감독들이 다 똑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반응들은 각기 다르다.
아무리 그들을 조건 짓고 있는 이데올로기 자체를 바꾼다고 슬로건들을 내세운 속에서 그 어떤 마술적인 변혁을 기대하지 않으면서 천천히,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것이 바로 비평의 해야 할 일인 것이다.
내가 나중에 다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몇 가지를 집고 넘어가자면: 모든 영화는 정치적이고, 그것을 생산해내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결정이 된다. (아니면, 그곳에서 이데올로기가 생성되든지, 그 줄기는 같은 것이다.) 영화는 더더욱 철저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결정되어 있는데, 왜냐하면 다른 예술들이나 이데올로기 시스템과는 달리 문학을 출판하듯이 이것은 강력한 경제영향력을 결집시키기 때문이다. (책이라는 상품이 되기까지 유통과, 광고, 그리고 판매의 단계에 이르기까지 이 둘은 같은 역할을 한다.) 확실히, 영화는 현실을 복제하고 잇다: 이것은 카메라와 필름 뭉치가 이데올로기를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영화 만들기에 있어, 도구들과 기술들은 그 자체의 현실의 일부분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현실이란 지배 이데올로기의 표현에 불과하지 않다.
이렇게 볼 때, 전통적인 영화이론들, 즉, 카메라는 세상이라는 구체적인 현실의 세계를 이해하고,
혹은 거기에 스며들게 하는 공명정대한 기구라는 견해는 상당히 반동적인 것이다. 사실 카메라가 잡아내는 것은 막연하고, 공식화되지 않고, 이론화되지 않고, 생각이 없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세계인 것이다.
카메라는 세상이 그 자체와 소통하는 하나의 언어인 셈이다.
그들은 그것들의 이데올로기를 구성해내는데, 이데올로기에 의해 걸러진 후에 그것이 경험되는 세상 그대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좀더 자세히 알튀세르가 정의하듯이, 이데올로기란 지각되고, 받아들여지고, 문화적인 대상들로 인해 고통을 겪게 된다. 이런 과정은 근본적으로 인간에게 영향을 끼치지만, 그들은 이 과정을 깨닫지 못한다. 인간이 이데올로기 속에서 표현하는 것은 그들 존재에 대한 진실된 관계성이 아니라, 어떻게 존재의 조건에 대해서 반응하느냐인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관계와 상상 속의 관계에 대한 전제 조건인 셈이다.) 그래서, 우리가 영화를 만든다고 할 때, 그 첫 번째 샷부터 우리는 사물 재현의 요구는 방해를 받게 되는데, 그것은 그 존재 자체로서의 재현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에 의해 굴절된 상으로의 재현을 말하게 된다.
이것은 제작의 모든 단계에서 나타난다: 주제, '스타일', 형식, 의미, 스토리전개 전통;
모든 것이 일반적인 이데올로기 담론을 강화하고 있다. 영화는 그 자체에서 자체로 드러나고, 말하고, 그 자체에 대해 배우는 이데올로기이다. 우리가 일단 영화를 이데올로기의 도구로서 전화시키는 시스템의 본질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영화감독의 제일 임무가 영화의 소위 말하는, 현실의 재현이라는 것을 드러내 보이고, 그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가 영화와 이데올로기 기능간의 관계를 분열시키고, 가능하면 절단시킬 수 있는 기회가 일을 것이다. 오늘날 가장 중요한 영화의 기능은 그들이 이것을 하느냐, 아니면 하지 않느냐에 있는 것이다.
a. 첫 번째이면서도 가장 거대한 범주는 철저하게 지배 이데올로기에 물들어 있는데 그 방식이 너무도 깨끗하고 순수한 형태여서, 영화 제작자들 조차도 그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영화들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단순히 소위 '상업'영화만을 일컫지 않는다. 모든 범주에 있어서 대부분의 영화들이 그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자각하지 않지만 도구이다. 그 영화가 상업적이든, 야심작이든, 현대적이든, 전통적이든, 예술극장에서 상영되든, 작은 영화관이든, 고전영화에 속하든지, 젊은 영화에 속하든지, 거의 대부분이 다 똑같은 이데올로기를 비벼놓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모든 영화가 상품이고 그래서 교환의 대상이며, 그들의 담론이 숨김없이 정치적이다,
이것이 왜 대대적으로 홍보가 되었을 때 정치적 영화가 되기 위한 철저한 정의가 요구되는 이유이다. 이데올로기와 영화의 합병은 관객과 경제적인 반응이 한가지로 그것도 같은 것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반영된다. 직접적인 정치적 실습과의 연속성에서, 이데올로기 실습은 담론으로 강화되는 사회적 요구를 재정비하게 된다.
이것은 가설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확립된 사실이다. 이데올로기는 그 자체에게 말을 한다;
이것은 질문을 하기도 전에 이미 모든 해답을 가지고 있다. 확실이 대중의 요구와 같은 것들이 있긴 하지만, 그러나 대중이 원하는 것'이라는 것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원하는 것이란 의미인 것이다. 대중과, 대중이 원하는 것이란 개념은 이데올로기가 그것을 합리화하고 그것을 영속시키기 위해 창조해낸 것이다. 그리고 대중은 오직 이데올로기의 양식화된 사고를 통해서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폐쇄회로로, 끊임없이 똑같은 환상을 반복해 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예술적 형태의 단계에서도 똑같다.
이 영화는 완전히 현실을 묘사하는 확립된 체계만을 받아들인다: '브르조아 사실주의' 그리고 보수적인 계략들의 합: 생명, 인간성, 상식 등의 맹목적인 믿음들, 축복받은 무식함 즉, 모든 단계의 생산의 단계에서 나타나는 묘사의 개념이 어딘가 잘못되었을 것이라는 그래서, 우리한테는 매표소의 판매수익보다는 상업적이라는 개념이 더욱더 영화에 있어서 측정기준이 되는 것이다. 어떤 영화도 이데올로기에 반해서, 혹은 관객의 신비화에 반해서 삐걱거릴 수 없다. 관객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일상생활의 이데올로기와 영화 스크린 상에 나타난 이데올로기와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참으로 안심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영화 평론가에게는 이데올로기 시스템과 그것의 상품이 하나로 통합되는 것을 보는 것은 상호 보완적으로 유용한 것이다. 어찌하여 영화 관객에게 독백이 되는지, 예를 들어 Melville, Oury, Lelouch와 같은 감독의 성공적인 영화를 살펴보더라도 이데올로기가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것을 공부하는 것은 중요하다.
b. 두 번째 담론은 그 자신의 이데올로기 동화를 두 가지 측면에서 공격하는 영화들이다.
첫 번째로 직접적인 정치적 행동에 의해, '기의'의 단계에서, 그들은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주제들을 다룬다. '다룬다'라는 말은 여기에서 능동의 의미이다: 그들은 단순히 이슈를 토론하고, 반복하고, 부연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를 공격하기 위해 사용한다.(이것은 이데올로기적인 행동의 정반대인 이론적인 행동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러한 행동은 이것이 전통적인 현실의 재현방식을 파괴하는 것과 연관 있을 경우에만 정치적으로 효과가 있게 된다. 형식의 단계에서는, 화해되지 않고, The Edge and Earth in Revolt, 묘사에 대한 개념에 대한 저항과 그것을 구체화하는 전통에 대한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양측의 행동, 즉 '기표'와 '기의'만이 만연해 있는 이데올로기에 저항해서 작동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경제/정치적이고 공식적인 행동이 결합되어야 한다.
c. ,가익보단 이중작동의, 또 하나의 담론이 있는데, 이것은 방식이 거슬러서 반대로 작동한다.
그 내용은 명백하게 정치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너무 철저해 비평이 이 형식을 통해서 작동되고 있다. 이 범주에 Mediterranee, the Belboy, Persona..등이 속해 있는 것이다.
Cahiers에게는 영화작품들은 (b와c)는 영화에 필수적이고 잡지의 주요 주제가 되어야 한다.
d. 네 번째의 경우: 이 영화들은, 요즘 들어서 많이 들어나고 있는, 명백하게 정치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z는 마치 청치학의 재현이 처음부터 끝까지 끊임없이 이데올로기적인 것처럼 최고의 예가 아니다; 좀 더 나은 예가 Le Temps de Vivre가 될 것이다.) 그러나 효과적으로 그 자신이 속해 있는 이데올로기 시스템을 비판하고 있지 못한다. 왜냐하면 물을 필요도 없이 그것의 언어와 이미지가 그 이데올로기 속에 깊숙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비평가에게 이런 영화들의 의도된 정치적 비판의 효과성을 검증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 되게 하였다. 그들이 자신들이 비난하려고 했던 것들을 오히려 표현하고, 보충하고, 강화하였는가? (a를 보라)
e. 다섯번 째: 처음에 보기에는 확실이 이데올로기 안에 속해 있는 것 같고 그 통치 안에 있는 것 같은 영화가, 그러나 단지 애매한 방식으로 그랬던 것이 밝혀지는 영화가 있다. 이것들은 처음에는 온건하게 비판하는 회유적인 솔직한 반동인, 혁신적이지 않은 관점에서 출발했지만 계속 꾸준히 작업을 해서, 시작점과 끝점 사이에 엄청난 전위와 눈에 띨 정도의 간극이 있는 것들이다.
우리는 일관되지 않고, 중요하지 않은, 감독이 지배 이데올로기를 의식적으로 사용하고, 그러나 절대적으로 직설적으로 말하는 영화는 무시한다. 우리가 말하는 영화는 그것에 봉사하고 코스를 이탈하게 하는 이데올로기에 반해서 방해물을 던져버리는 것이다.
영화적인 틀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보게 하지만, 또한 그것을 보여 줌으로서 규탄하는 것이다. 두 가지의 순간들이 들어있는 틀을 살펴보자:
하나는 어느 정도의 제한 안에서 하나는 그것을 지니고 있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거스르는 것이다.내적 비판은 솔기부분에서 영화의 갈라짐이 일어난다. 어떤 사람이 증상들을 찾으며, 영화를 삐딱하게 본다면 그 사람은 이것이 갈라진 틈 투성이 인 것을 볼 것이다: 이데올로기 적으로 아무 해가 없는 영화 속에서 있지도 않은 내적 긴장감으로 분리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데올로기는 이 테스트에 점점 종속되는 것이다. 더 이상 존재에 독립적이지 못한다:
그것은 영화에 의해 재현이 된다. 이것은 바로 많은 헐리웃 영화들의 상황이다. 예를 들어 시스템과 이데올로기가 완벽하게 통합되었지만 결국 부분적으로 속에서부터 시스템이 와해되는 것이다.
우리는 영화감독들이 그의 영화의 언어로서 다시 재현함으로써 이데올로기를 부식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그가 단순히 그의 영화를 자유주의 편향의 주먹 한방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이데올로기의 의해 즉시 만회하고 말 것이다; 그 반면에, 그가 그것을 이미지의 더 깊은 단계까지 생각하고 깨닫는다면 그것은 더욱 파괴적인 힘이 될 가능성이 있다. 물론 그가 이데올로기 자체를 깨뜨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단순히 그의 영화 속에서 반영할 수는 있다. (Ford, Dreyer, Rosselini의 영화와 같은 예에서처럼.) 영화의 범주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우리는 절대적으로 작금의 마녀사냥에 동조하고 싶은 의도는 없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믿음에 대한 신화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비판하고, 물론 그런 것이 글로써 쓰여질 의도는 없지만, 그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은 부적절하고 주제넘은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작동되고 있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f. 'live cinema'(cinema direct)라고 불리는 영화 종류, 그룹 (하나의 큰 그룹이나 두 개의 그룹들).
이들은 정치적 이벤트나 반성으로부터 나왔는데, 그들과 비정치적인 영화와의 명확한 구분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화의 전통적인 이데올로기적으로 조작된 재현의 방식에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광부들의 투쟁은 Les Grandes Familles의 스타일과 같이 찍을 것이다. 이런 영화들의 감독들은 마치 그들이 내러티브 전통의 이데올로기적인 필터를 제거해버리면 현실자체가 진실된 형식으로 굴복할 것이라는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환상들에 사로 잡혀 있다.
(공적인 아름다움에 강조점을 둔, 중심 생각으로 구성된 지배적인 생각들, 연출기법이나 건축양식)
사실 그렇게 함으로써, 오직 하나의 필터는 제거 할 수 있지만, 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안된다. 현실은 그 안에 이론과 진실의 자기 인식의 숨겨진 핵을 마치 과일 속에 들어있는 돌과 같이 가지고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현실'과 '인지된'사물간의 구별에서 이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Leacock의 Chief와 the May films의 a good number를 비교해 보라.
이것은 왜 시네마 디렉트의 옹호자들이 그의 역할을 표현하기 위해서, 마치 다른 사람들이 위해 기술의 생산품에 대해서 사용하듯이 그것의 성공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똑같은 이상주의적인 용어들을 사용하는가의 이유이다. :
'정밀함', '삶의 경험에 대한 느낌', '강한 진실의 섬광','생생한 순간들''우리가 영화를 보고 있는 느낌의 폐기'그리고 마지막으로: 환상.
이것은 '보는 것이 이해하는 것이다'라는 마술적인 개념이다: 이데올로기는 그 자체가 진실로 무엇인지가 드러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을 비난하지 않게 단순히 응시하게끔 펼쳐 보여준다.
g. 'live cinema'의 다른 종류. 여기 '외면을 통해 보는 것'이 카메라라는 생각에 만족하지 않는 감독이 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영화 속의 구체적인 물건들에 능동적인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기본적인 묘사의 문제를 공격한다. 그럼으로써 이것은 생산적인 의미가 되고, (이데올로기) 외부에서 생산되는 의미의 수동적인 저장소가 아니게 된다.
:Le Regne du Jour, La Rentree des Usines Wonder
비평적 기능
그러면, 우리의 비병적인 작업의 분야:
이데올로기 안에서 이런 영화들, 그리고 그들의 그것과의 다른 관계들. 여기서부터 정확하게 정의된 분야가 네 가지 기능으로 나온다:
1. 범주 a의 경우: 그들의 맹목적인 분야를 드러내라; 어떻게 그들이 이데올로기에 의해 완전히 결정되었고, 틀이 잡혔는지에 대해서;
2. 범주 b, c 그리고 g의 경우 두 가지의 단계로 읽고, 기표와 기의의 단계에서 어떻게 중심적으로 기능을 하고 있는지 드러내라.
3. 범주 d와 f의 경우 기표에 대한 기술적이고 이론적인 작업이 부재되었을 경우, 기의(정치적인 주제들)가 항상 약화되고, 무해하게 되는지를 보여라.
4. 그룹 e의 경우 영화와 영화가 작동하는 방식에 의한 이데올로기에 의해 생성되는 간극을 지적하고, 그것들의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라.
(논평, 해설, 해독) 고찰이든가, 방대한 헛소리들 (영화 칼럼류와 같은)에는 우리의 비평을 수행을 여유가 없다. 그것은 영화제작을 주관하는 엄격한 사실분석일 것이다.
손에 잡힐 듯한 또 하나의 요소인, (경제적 상황, 이데올로기, 요구 그리고 반응) 그리고 그 속에 나타나는 의미들과 형태들에 대한 분석이다. 변덕스럽고 곧 사라질 영화에 대한 글쓰기의 전통은 그것이 많은 것뿐만 아니라 끈질기기까지 하다.
그리고 오늘날의 영화분석은 아직도 대부분 이상주의적 전제들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다. 이들은 오늘날 더 나아가 떠돌아 다니는데, 그러나 아직도 기본적으로 이 방식은 경험주의적이다. 이것은 영화의 기표적인 구조, 이것의 형식적인 조직이라는 물질적인 요소들로 돌아가는 기초적인 단계를 통해왔다.
이것의 첫 번째 단계는 자신의 글에서 그에 대해 반대되는 글들이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부정할 수 없이 앙드레 바쟁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구조주의적 언어학을 기본으로 하는 접근방식을 따른다. (거기에는 우리가 빠지는 두 가지 기본적인 덫이 있는데,그 중 하나가 현상학적인 실증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기계적인 유물론이다.) 비평이 이 단계를 넘어서게 되면, 그 다음 단계로 가야 된다.
우리에게는 진보의 유일한 가능한 선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직접적인 참조가 되는, 규정하는 대상들을 엄밀하게 이해하는 하나의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그 중에서도 아이젠슈타인 ) 영화의 비평적 이론, 즉, 20년대 러시아 감독들의 이론적 저작들을 이용하는 것이다. 마법에 의해 하룻밤 만에 매거진의 정책이 교정이 될 수도, 되어서도 안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우리는 몇 달이든, 인내심을 갖고, 임의적인 변화에 믿음을 싣는 일반적 오류를 피하기 위해 그리고, 준비도 되지 않은 채 혁명으로 성급히 돌진을 시도하는 것을 조심을 해야 한다.
이 단계에서 진실이 우리에게 드러났다고 주장하기 시작하는 것은 '기적'이나, '개심'을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어떤 작업이 진행 중이며, 그것과 관련이 되어있는 글들을 그것이, 명백하든지, 함축적이든지 간에 출판하는 것이다. 우리는 간단히 어떻게 잡지의 다양한 요소들이 이 관점에 맞아떨어지는 지 알려야 한다.
이 일의 가장 중요한 분야는 분명히 이론적 기사들과 비평에 있다.
요즘에는 이 둘간의 간격이 점점 좁아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우리의 관심이 요즘 영화의 장단점을 부풀리는데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유머 있는 기사에서 '제품을 웃겨 뒤집어버려라' 하고 쓰듯이, 그것이 화제거리가 되는 것에 대한 관심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인터뷰와 영화의 제목과 일기형식의 칼럼은 서류와 나중에 가능하면 토의할 때 서류들과 보충 자료들과 함께, 자주 이론보다 정보 면에서 더 강하다.
이것은 어떤 비평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지 아닌지, 그렇다면 이유는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독자에게 달려있다.
2009년 6월 11일 목요일
2009년 6월 10일 수요일
장미의 장례와 거리두기
장미의 장례행렬은 단순해 보이지만 절대로 단순하지 않고,
벌써 40년이나 지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요즘 나온 영화들보다도 더더욱 현대적이고 실험적이고
동시에 균형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감독 마츠모토 토시오는 일본의 ATG(저예산 독립 영화 지원단체)의 지원으로 만들어졌기에
흥행에 대한 압박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웠기에 이런 작품이 가능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이 작품을 보면서, 집중을 했던 부분은 이야기 구조다.
이 영화는 준이라는 게이와 다른 트랜스 젠더들 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영화속 이야기 전개는 관객으로 하여금 환상속으로의 몰입과 감정이입을 하게끔 유도하다가도,
자주 또하나의 영화속에서 연기, 혹은 인터뷰를 하고 있는 장면임을 보여주면서 끊임없는 거리두기를 시도한다.
주인공 준에게 갑자기 게이로서의 의견을 물으면서 다큐적인 성격을 드러내다가,
다시 영화속의 이야기 흐름을 따라가는 영화적 성격으로 이어지고,
다시 그렇게 몰입을 하다가 보면, 또다시 그것이 하나의 극속 연기였던 것처럼 액자구조인양
영화 밖으로 처절하게 내팽개쳐진다.
객관적으로 그 공간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마지막 부분의 가장 강렬하고 그로테스크한 눈 찌르는 장면에서도 이 공식은 마찬가지로 진행된다.
오히려 최고조에 달한다.
준이 자신의 운명을 깨닫고 마치 예언 되었던 것처럼 신화적으로 자신의 눈을 날카로운 칼라 찌를때,
갑자기 감독 자신이 화면에 침입하고 나타난다.
그리고 친절하게 (일본인 특유의 친절한 엑센트와 몸짓으로) 이 순간에 대해 부연설명 해준다.
'이 얼마나 코믹한 인생이냐면서.' 사실, 그러한 얘기를 들을 때까지만해도 그 말은 역설로 들렸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잔인한 장면을 코믹하다고 해석을 했을까..'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 이후부터는 마술처럼 그 장면이 코믹하게 보여지기 시작한다.
갑자기 양 눈이 찔려 피가 줄줄 흘리면서 밖으로 나가는 장면은 예외없이 코믹하게 되어버린것이다.
감독이 갑자기 예언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마지막 장면에서 환한 대낮에 주인공은 두 눈이 찔려 아무것도 보지도 못하며서
좀비처럼 길가에 서있고, 그를 둘러싼 많은 사람들은 꽤나 무신경한 듯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다.
참으로 코믹하고, 참신했다. 대단한 거리두기와 객관화다.
둘째로 이 영화에서 나의 관심을 사로 잡았던 부분은 주술적인 신화적인 상징들이었다.
게이바의 퀸이었던 전 주인이 주인공과의 경쟁에서 밀리면서 자살을 하고, 그는 흰 장미로 둘러싸인 침대에 누워있다.
나는 이 영화의 장미의 장례행렬이라는 점을 상기하면서
장미의 의미를 알고자 , 특히 흰장미의 의미를 찾아보고자 했지만, 딱히 큰소득은 없었다.
단지 옛날 아도니스라는 미소년은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의 사랑을 받고 있었는데, 이를 질투한 아프로디테의 남편
헤파이스토스는 멧돼지로 변해서 사냥을 하던 아도니스를 물어 죽였다.
이때 아도니스가 죽으면서 흘린 피에는 아네모네 꽃이 피었고 아프로디테의 눈물에서는 장미꽃이 피었다고 한다는 정도였다.
영화속에서 단서를 찾아한다면 게이바에 전주인었던 곤다가 생전에 가장 좋아했던 꽃이 흰 장미였고,
그래서 장례식에 참석했던 다른 트랜스 젠더들이 생화를 쓰지 못하고, 흰장미를 조화를 쓸 수 밖에 없었다고 한탄한다.
아마도 그랬나보다.
조화인 흰장미의 의미가 이 영화의 중심에 있는 것이다.
백색의 순결함과 성스러움등을 그렇게 소원했지만, 그들은 끝내 얻지 못한다.
죽어서까지도 자연스러움을 성취하지 못한채 조화라는, 생명없는 꽃으고 끝맺음을 한다.
한낱 소원으로만 그치는 인공 흰장미들의 장례행렬 말이다.
그래서 어쩌면 감독은 그것을 인공적으로 거리두기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의 게이주인공은
영화내내 아름다웠다가 결국에는 코믹했다.
과학적 비평은 범위와 방법론을 명확히 규정해야만 한다. 이것은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상황에 대한 자각과 제안된 학문의 범위에 대한 엄격한 분석그리고 작업을 필요하게 하면서,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과 작업을 완수하기 위한 특볋난 기능들을 함의하고 있다.
Cahiers du Cinema에서 우리는 우리의 입장과 목표에 대한 전세계적인 분석을 실시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완전 무의 상태에서부터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분석의 조각들이 우연인 듯, 막연한 상태의 최근 우리가 출판했던 것들 (기사, 논설,토론, 독자에 대한 회답, 편지) 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것은 우리의 독자들도 우리 못지 않게 둘로 나눌수 없는 비판적 실천과 그것의 장을 연결시키는명료한 이론적 토대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프로그램화와 혁명적인 계획들 그리고 선언들은 그 자체들로서 종국을 맞기가 쉬기에 우리가 피하려고 하는 함정이다. 우리의 목표는 우리가 하고 하고자 하는 것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고 있는것,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드러내는 것인데, 이것은 현재상황에 대한분석없이는 불가능한 것들이다.
어디에?a.첫번째로 우리가 처해있는 장소이다. Cahiers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우리가 같이 하는 일의 결과중 하나는 잡지를 통해서 보여진다. 잡지라는 특정한생산물은 누군가 그것을 쓰고, 누군가 그것을 출판해 내고, 그리고 누군가는 그것을 읽게되는 특정한 양의 노동과 관련이 되게 된다. 우리는 이런 상품의 본성이 자본주의 출판계의 경제 시스템(출판 양식, 발행부수의 범위 등등)속에서 공명정대하게 위치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여하튼, 시스템에 평행하는 유토피아적인 사고들로 길을 읽지 않았다면, 오늘날 다른 방식을 가정하기는 힘들것이다. 후자의 접근에 있어서 첫번째 단계는시스템을 무효화시킬수 있는 호의적인 믿음에서, 도피하고자 시도하는 것으로부터 같이 있는 새로운 시스템은 언제나 거짓 전선이다. 사실 이것이 할 수 있는 전부는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사실 할 수 있는 전부는 거부하는 것이다. (이상주의자의 순수주의)와 결정적으로 머지않아 그 자체로 모델화되는적들에 의해 위험에 처해지게 되는 것이다. 이 평행주의는 오직 한방향으로만 작동된다.우리는 양방향으로 작동해야된다고 믿는 반면, 이것은 상처입은자의 한 방향만을 건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무한대에서의 고속의 평행선의 만남의 위험성은우리에게 차라리 유한대에서 서로가 평인상태로를 인정하면서 유지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주장하는 듯 하다.이렇게 가정되었을때,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의 상황에서 우리의 태도는 무엇인가?프랑스에서 영화의 대부분은 , 대부분의 책이나 잡지에서 처럼,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안에서자본주의 경제구조에 의해서 생산되고, 분배된다. 사실, 엄격히 말해서, 아무리 진취적인 것을 채택해서 시도한다고 해도, 우리는 다 이렇다. 이런 상태이므로, 우리가 물어야 하는 질문은 이것이다: 어떤 영화, 책, 그리고 잡지가 자유롭게, 방해받지 않는 문장을 쓴 이데올로기를 허용하며, 투명하게 전달하고, 선택된 언어로서 작용할 수 있을까?그리고 어떠한 시도가 그것을 다시 되돌리고, 반성하고, 그것들을 막아냄으로서, 그 메카니즘을 '폭로해서 분명히 눈에 보이도록 할 수 있을까?b.우리가 연기하고 있는 장소는 영화의 장이다. (Cahiers는 영화잡지), 그리고우리 연구의 분명한 목적은 영화의 역사이다.그것이 어떻게 기획되고, 제조되며,배분되고, 이해되는가 말이다.오늘날의 영화는 무엇인가? 이것은 적절한 질문의다; 아니다. 전에 그랬을 법하게도: 영화는 과연 시네마는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이론과 지식의 실체가 현재의 공허한 개념과 말들을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해 진화해나갈때 까지 이론의 실체, 지식의 실체에대해서 질문을 던질 수 없을 것이다.영화잡지로서 질문은 역시 이것이다: 어떤 일들이 영화로 구성된 범위들에서 행해져야 하는가?그리고 특히 Cahiers로서는: 이 부분에서 우리의 특별히 해야하는 기능은 무엇인가?우리를 달느 잡지와 구별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영화들.영화는 무엇인가? 한편으로는 이것은 특별한 상품인데, 주어진 경제관계 시스템속에서, 자본주의자에게는 돈으로 이해되는 생산하기 위한 노동과 연관지어서 제조되고 있다. 이런 상황은 독립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던가, 'new cinema'를 지향하는 사람들 조차 똑같은 목적을 위해특정한 수의 노동자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이것은 감독에게조차 , 그가 Moullet던지 Oury던지 상관없이 영화노동자 분석의 마지막 단계로 적용된다.) 이것은 시장의 법칙에 의해 좌우되는 매표 수입이나, 계약 등의교환가치를 지니고 있는 상품으로 변형이 된다. 다른한편, 이런 시스템속의 물질적 상품화의결과로서, 이것은 또한 시스템상의 이데올로기적이 상품화가 되는 것이다. 프랑스의 경우그것은 자본주의를 뜻하는 것이다.
어떤 영화관계자라도, 단지 자신의 개인적인 노력으로, 그의 영화의 생산과 분배를 관장하는 경제관계를 바꿀 수 있을 수는 없다. (내용과 형식상으로 혁명적인 영화로서 출발한 영화감독이랄지라도 경제구조상의 순식간의 변화나 급진적인 변혁을 가져올 수는 없다는 것은 여러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물론 훼손시키거나, 편향시킬지는 몰라도 그것을 무효화시거나, 그것의 구조자체를 심각하게전복시킬 수는 없다. 고다르가 최근 자신은 이러한 구조속에서 일하기를 그만두고 싶다고 언급한 것은 그 어떤 조직도 그가 피하기를 원했던 것들의 투영이라는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자금은 더이상 프랑스에서 조달되지 않는다고 해도 영국, 이태리, 미국등이 그것을 맡게 된다. 영화가 더이상 독점적인 배급에의해 시장에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또다른독점인 코닥의 필름으로 영화를 찍는 것이다. ) 왜냐하면 모든 영화는 경제시스템의 일부분일 수 밖에 없고, 영화와 예술이 이데올로기 상의 하나의 가지들이기에, 이데올로기의 시스템안의 일부분일 수 밖에 없다. 어느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고, 마치 퍼즐조각들처럼 어디선가할당된 일부분의 몫이 있는 것이다. 이 시스템은 그 본질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아니 사실은 그러한 이유때문에 이 모든 조각들이 다 맞춰졌을때는 그림이 확실하게드러나는 것이다. 그러한 모든 영화감독들이 다 똑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반응들은각기 다르다. 아무리 그들을 조건짓고 있는 이데올로기 자체를 바꾼다고 슬로건들을 내세운 속에서 그 어떤 마술적인 변혁을 기대하지 않으면서 천천히,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것이 바로 비평의 해야 할 일인 것이다. 내가 나중에 다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몇가지를 집고 넘어가자면: 모든 영화는 정치적이고, 그것을 생산해내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결정이 된다. (아니면, 그곳에서이데기올로기가 생성되든지, 그 줄기는 같은 것이다.) 영화는 더더욱 철저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결정되어있는데, 왜냐하면 다른 예술들이나 이데올로기 시스템과는 달리 문학을 출판하듯이이것은 강력한 경제영향력을 결집시키기 때문이다. (책이라는 상품이 되기까지 유통과, 광고, 그리고 판매의 단계에 이르기까지 이 둘은 같은 역할을 한다.)확실히, 영화는 현실을 복제하고 잇다.: 이것은 카메라와 필름 뭉치가 이데올고기를 위한 것이라는점이다. 그러나 영화만들기에 있어, 도구들과 기술들은 그자체의 현실의 일부분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현실이란 지배 이데올로기의 표현에 불과하지 않다. 이렇게 볼때, 전통적인 영화이론들, 즉, 카메라는 세상이라는 구체적인 현실의 세계를 이해하고, 혹은 거기에 스며들게 하는 공명정대한기구라는 견해는 상당히 반동적인 것이다. 사실 카메라가 잡아내는 것은 막연하고,공식화되지 않고,이론화되지 않고, 생각이 없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세계인 것이다. 카메라는 세상이 그자체와 소통하는 하나의 언어인 셈이다. 그들은 그것들의 이데올로기를 구성해내는데, 이데올로기에 의해 걸러진 후에 그것이 경험되는 세상 그대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좀더 자세히 알튀세르가 정의하듯이, 이데올로기란 지각되고,받아들여지고, 문화적인 대상들로인해 고통을 겪게된다. 이런과정은 근본적으로 인간에게 영향을 끼치지만, 그들은 이과정을 깨닫지 못한다. 인간이 이데올로기속에서 표현하는 것은 그들존재에 대한 진실된 관계성이 아니라, 어떻게 존재의 조건에 대해서 반응하느냐인 것이다; 그것이진정한 관계와 상상속의 관계에 대한 전제 조건인 셈이다.) 그래서, 우리가 영화를 만든다고 할때, 그 첫번째 샷에서부터 우리는 사물들을 재현해재는 요구에 의해 방해를 받게 되는데, 그것은그 존재 자체로서의 재현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에 의해 굴절된 상으로의 재현을 말하게 된다.이것은 제작의 모든 단계에서 나타난다: 주제, '스타일', 형식, 의미, 스토리전개 전통; 모든것이 일반적인 이데올로기 담론을 강화하고 있다. 영화는 그자체에서 자체로 드러나고, 말하고,그 자체에 대해 배우는 이데올로기이다. 우리가 일단 영화를 이데올로기의 도구로서 전화시키는시스템의 본질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영화감독의 제일 임무가 영화의 소위 말하는, 현실의 재현이라는 것을 드러내 보이고, 그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가 영화와 이데올로기 기능간의 관계를 분열시키고, 가능하면 절단시킬수 있는 기회가 일을 것이다. 오늘날 가장 중요한 영화의기능은 그들이 이것을 하느냐, 아니면 하지 않느냐에 있는 것이다.a. 첫번째이면서도 가장 거대한 범주는 철저하게 지배 이데올로기에 물들어 있는데 그 방식이 너무도 깨끗하고 순수한 형태여서, 영화 제작자들 조차도 그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영화들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단순히 소위 '상업'영화만을일컫지 않는다. 모든 범주에 있어서 대부분의 영화들이 그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자각하지 않지만 도구이다. 그 영화가 상업적이든, 야심작이든, 현대적이든, 전통적이든, 예술극장에서 상영되든, 작은 영화관이든, 고전영화에 속하든지, 젊은 영화에 속하든지, 거의대부분이 다 똑같은 이데올로기를 비벼놓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모든 영화가 상품이고 그래서 교환의 대상이며, 그들의 담론이 숨김없이 정치적이다, 그래서 정치적 영화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은 정의상 정치적인 영화를구성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와 영화의 합병은 관객과 경제적인 반응이 한가지로 그것도 같은 것으로 귀결된다는점에서 반영된다. 직접적인 정치적 실습과의 연속성에서, 이데올로기 실습은 담론으로 강화되는사회적 요구를 재정비하게 된다. 이것은 가설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확립된 사실이다. 이데올로기는 그자체에게 말을 한다;이것은 질문을 하기도 전에 이미 모든 해답을 가지고 있다. 확실이 대중의 요구와 같은 것들이 있긴 하지만, 그러나 대중이 원하는 것'이라는 것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원한는 것이란의미인 것이다. 대중과, 대중이 워하는 것이란 개념은 이데올로기가 그것을 합리화하고 그것을영속시키기 위해 창조해낸 것이다. 그리고 대중은 오직 이데올로기의 양식화된 사고를 통해서만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폐쇄회로로, 끊임없이 똑같은 환상을 반복해 내고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예술적 형태의 단계에서도 똑같다. 이 영화는 완전히 현실을 묘사하는확립된 체계만을 받아들인다: '브르조아 사실주의' 그리고 보수적인 계략들의 합: 생명, 인간성, 상식 등의 맹목적인 믿음들, 축복받은 무식함 즉, 모든 단계의 생산의 단계에서 나타나는 묘사의 개념이 어딘가 잘못되었것이라는 그래서, 우리한테는 매표소의 판매수익보단느 상업적이라는개념이 더욱더 영화에 있어서 측정기준이 되는 것이다. 어떤 영화도 이데올로기에 반해서, 혹은 관객의 신비화에 반해서 삐걱거릴수 없다. 관객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일상생활의 이데올로기와영화 스크린 상에 나타난 이데올로기와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참으로 안심이되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영화 평론가에게는 이데올로기 시스템과 그것의 상품이 하나로 통합되는 것을 보는 것은 상호 보완적으로 유용한 것이다. 어찌하여 영화가 관객에게 독백이되는지, 예를 들어 Melville, Oury, Lelouch와 같은 감독의 성공적인 영화를 살펴보더라도이데올로기가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것을 공부하는 것은 중요하다.b. 두번째 담론은 그 자신의 이데올로기 동화를 두가지 측면에서 공격하는 영화들이다.첫번째로 직접적인 정치적 행동에 의해, '기의'의 단계에서 , 그들은 직젖ㅂ적으로 정치적인 주제들을 다룬다. '다룬다'라는 말은 여기에서 능동의 의미이다.: 그들은 단순히 이슈를 토론하고, 반복하고,부연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를 공격하기 위해 사용한다.(이것은 이데올로기적인 행동의 정반대인 이론적인 행동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러한 행동은이것이 전통적인 현실의 재현방식을 파괴하는 것과 연관있을 경우에만 정치적으로 효과가있게 된다. 형식의 단계에서는, 화해되지 않고, The Edge and Eath in Revolt, 묘사에 대한 개념에 대한 저항과 그것을 구체화하는 전통에 대한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다.우리는 오직 양측의 행동, 즉 '기표'와 '기의'만이 만연해 있는 이데올로기에 저항해서 작동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경제/정치적이고 공식적인 행동이결합되어야 한다.
[[[[[c.똑같은 이중작동의, 그러나 거슬려서 작동하는 또하나의 담론이 있다. 그 내용은 명백하게 정치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 형태를 거쳐서 비판을 거쳐서 작동되기에 몇몇은 꽤 철저하게작동되고 있다. 이 범주에 Mediterranee, the Belboy, Persona..등이 속해 있는 것이다.]]]
[[[[Cahiers에게는 영화 (b와c)는 시네마에게는 필수적이고 잡지의 주요 주제가 되어야 한다.]]
d.네번째의 경우: 이 형화들은, 요즘들어서 많이 들어나고 있는, 명백하게 정치적인 내용을포함하고 있다.(z는 마치 청치학의 재현이 처음부터 끝까지 끊임없이 이데올로기적인것처럼 최고의 예가 아니다; 좀 더 나은 예가 Le Temps de Vivre가 될 것이다.)그러나 효과적으로 그 자신이 속해 있는 이데올로기 시스템ㅇ르 비판하고 있지 못한다. 왜냐한면 물을 필요도 없이그것의 언어와 이미지가 그 이데올로기 속에 깊숙히 박혀 있기 때문이다.이것이 비평가에게 이런 영화들에게서 의도된 정치적 비판의 효과성ㅇ르 검증하는 것이중요한 일이 되게 하였다. 그들이 자신들이 비난하려고 했던 것들을 오히려 표현하고, 보충하고, 강화하였는가? (a를 보라)e.다섯번째: 처음에 보기에는 확실이 이데올로기 안에 속해 있는 것 같고 그 통치안에있는 것 같은 영화가, 그러나 단지 애매한 방식으로 그랬던 것이 밝여지는 영화가 있다. 이것들은 처음에는 온건하게 비판하는 회유적인 솔직한 반동인, 혁신적이지 않은 관점에서 출발했지만 계속 꾸준히 작업을 해서 , 시작점과 끝지점 사이에 엄청난 전위와 눈에 띨 정도의간극이 있는 것들이다. 우리는 일관되지 않고, 중요하지 않은, 감독이 지배 이데올로기를 의식적으로 사용하고, 그러나 절대적으로 직설적으로 말하는 영화는 무시한다. 우리가 말하는 영화는 그것에 봉사하고 코스를 이탈하게 하는 이데올로기에 반해서 방해물을 던져버리는 것이다. 영화적인 틀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보게 하지만 , 또한 그것을 보여줌으로서 규탄하는 것이다. 두가지의 순간들이 들어있는 틀을 살펴보자:하나는 어느정도의 제한안에서 하나는 그것을 지니고 있고, 또하나는 그것을 거스르는 것이다.내적 비판은 솔기부분에서 영화가 갈라짐이 일어난다. 어떤 사람이 어떤 증상들을 찾으며,영화를 삐딱하게 본다면 그 사람은 이것이 갈라진 틈 투성이 인것을 볼 것이다: 이데기올로기적으로아무 해가 없는 영화속에서 있지도 않은 내적 긴장감으로 분리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데올로기는 이 테스트에 점점 종속되는 것이다. 더이상 존재에 독립적이지 못한다: 그것은영화에 의해 재현이 된다. 이것은 바로 많은 헐리웃 영화들의 상황이다. 예를 들어 시스템과이데올로기가 완벽하게 통합되었지만 결국 부분적으로 속에서부터 시스템이 와해되는 것이다. 우리는 영화감독들이 그의 영화의 언어로서 다시 재현함으로서 이데올로기를 부식시킬 수 있는방섭을 찾아야만 한다: 그가 단순히 그의 영화를 자유주의 편향ㄷ뇌 한방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이데올로기의 의해 즉시 만회하고 말것이다; 그 반면에, 그가 그것을 이미지의 더 깊은 단계까지생각하고 깨닫는다면 그것은 더욱 파괴적인 힘이 될 가능성이 있다. 물론 그가 이데올로기 자체를깨뜨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단순히 그의 영화속에서 반영할 수는 있다. (Ford, Dreyer, Rosselini의 영화와 같은 예에서 처럼.) 영화의 범주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우리는 절대적으로 작금의 마녀사냥에 동조하고 싶은 의도는 없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름의 믿음에 대한 신화를가지고 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비판하고, 물론 그런 것이 글로써 쓰여질 의도는 없지만, 그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은 부적절하고 주제넘은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작동되고있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f. 'live cinema'(cinema direct)라고 불리는 영화 종류, 그룹 (하나의 큰 그룹이나 두개의 그룹들).이들은 정치적 이벤트나 반성으로부터 나왔는데, 그들과 비정치적인 영화와의 명확한 구분이 없다.왜냐하면 그들은 영화의 전통적인 이데올로기적으로 조작된 재현의 방식에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광부들의 투쟁은 Les Grandes Familles의 스타일과 같이 찍을 것이다.이런 영화들의 감독들은 마치 그들이 내러티브 전통의 이데올로기적인 필터를 제거해버리면현실자체가 진실된 형식으로 굴복할 것이라는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환상들에 사로 잡혀 있다. ( 공적인 아름다움에 강조점을 둔, 중심 생각으로 구성된 지배적인 생각들, 연출기법이나 건축양식)사실 그렇게 함으로써, 오직 하나의 필터는 제거 할 수 있지만, 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안된다.현실은 그 안에 이론과 진실의 자기 인식의 숨겨진 핵을 마치 과일 속에 들어있는 돌과 같이 가지고있다. (마르크스주의는 '현실'과 '인지된'사물간의 구별에서 이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Leacock의 Chief와 the May films의 a good number를 비교해 보라.이것은 왜 시네마 디렉트의 옹호자들이 그의 역할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리고 마치 다른 사람들이 위해 기술의생산품에 대해서 사용하듯이 그것의 성공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똑같은 이상주의적인 용어들을 사용하가의 이유이다. : '정밀함', '삶의 경험에 대한 느낌', '강한 진실의 섬광','생생한 순간들''우리가 영화를 보고 있는 느낌의 폐기'그리고 마지막으로: 환상.이것은 '보는 것이 이해하는 것이다'라는 마술적인 개념이다: 이데올로기는 그자체가 진실로 무엇인지가 드러나지 않기 위해서 , 자신을 비난하지 않게 단순히 응시하게끔 펼쳐 보여준다.g. 'live cinema'의 다른 종류. 여기 '외면을 통해 보는 것'이 카메라라는 생각에 만족하지 않는감독이 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영화속의 구체적인 물건들에 능동적인 역할을 부여함으로서 기본적인 묘사의 문제를 문제를 공격한다. 그럼으로써 이것은 생산적인 의미가 되고, (이데올로기)외부에서 생산되는 의미의 수동적인 저장소가 아니게 된다. :
[[[[[[Le Regne du Jour, La Rentree des Usines Wonder ]]]]
비평적 기능
그러면, 우리의 비병적인 작업의 분야:이데올로기안에서 이런 영화들, 그리고 그들의 그것과의 다른 관계들. 여기서부터 정확하게 정의된분야가 네가지 기능으로 나온다:1. 범주 a의 경우: 그들의 맹목적인 분야를 드러내라; 어떻게 그들이 이데올로기에 의해 완전히결정되었고, 틀이 잡혔는지에 대해서;2. 범주 b,c 그리고 g의 경우 두가지의 단계로 읽고, 기표와 기의의 단계에서 어떻게 중심적으로기능을 하고 있는지 드러내라.3. 범주 d와 f의 경우 기표에 대한 기술적이고 이론적인 작업이 부재되었을 경우 기의(정치적인 주제들)가 항상 약화되고, 무해하게 되는지를 보여라.4. 그룹 e의 경우 영화와 영화가 작동하는 방식에 의한 이데올로기에 의해 생성되는 간극을 지적하고, 그것들의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라.
(논평, 해설, 해독) 고찰을 위한 , (영화 칼럼류와 같은) [[[[방대한 [[[[[]]]]]]
이든지 비평적인 수행을 하기 위한 여유는 없다. 그것은 영화제작을 주관하는 엄격한 사실분석일 것이다. 손에 잡힐 듯한 또하나의 요소인, (경제적 상황, 이데올로기, 요구 그리고 반응) 그리고 그 속에 나타나는 의미들과 형태들에 대한 분석이다.변덕스럽과 곧 사라질 영화에 대한 글쓰기의 전통은 그것이 많은 것 뿐만 아니라 끈질기기까지 하다.그리고 오즐날의 영화분석은 아직도 대부분 이상주의적 전제들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다.이들은 오늘날 더 나아가 떠돌아 다니는데, 그러나 아직도 기본적으로 이 방식은 경험주의적이다. 이것은 영화의 기표적인 구조, 이것의 형식적인 조직이라는 물질적인 요소들로 돌아가는 기초적인 단계를 통해왔다. 이것의 첫번째 단계는 자신의 글에서 그에 대해 반대되는 글들이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부정할 수 없이 앙드레 바쟁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구조주의적언어학을 기본으로하는 접근방식을 따른다.(거기에는 우리가 빠지는 두가지 기본적인 덫이 있는데,그중 하나가 현상학적인 실증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기계적인 유물론이다.) 비평이 이 단계를넘어서게 되면, 그 다음 단계로 가야된다. 우리에게는 진보의 유일한 가능한 선은 20년대 러시아감독들의 이론적 저작들을 이용하는 것이다.(그중에소도 아이젠슈타인 ) 영화의 비평적 이론, 즉, 을 적용하고 정교화하기 위해서
Cahiers du Cinema에서 우리는 우리의 입장과 목표에 대한 전세계적인 분석을 실시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완전 무의 상태에서부터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분석의 조각들이 우연인 듯, 막연한 상태의 최근 우리가 출판했던 것들 (기사, 논설,토론, 독자에 대한 회답, 편지) 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것은 우리의 독자들도 우리 못지 않게 둘로 나눌수 없는 비판적 실천과 그것의 장을 연결시키는명료한 이론적 토대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프로그램화와 혁명적인 계획들 그리고 선언들은 그 자체들로서 종국을 맞기가 쉬기에 우리가 피하려고 하는 함정이다. 우리의 목표는 우리가 하고 하고자 하는 것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고 있는것,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드러내는 것인데, 이것은 현재상황에 대한분석없이는 불가능한 것들이다.
어디에?a.첫번째로 우리가 처해있는 장소이다. Cahiers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우리가 같이 하는 일의 결과중 하나는 잡지를 통해서 보여진다. 잡지라는 특정한생산물은 누군가 그것을 쓰고, 누군가 그것을 출판해 내고, 그리고 누군가는 그것을 읽게되는 특정한 양의 노동과 관련이 되게 된다. 우리는 이런 상품의 본성이 자본주의 출판계의 경제 시스템(출판 양식, 발행부수의 범위 등등)속에서 공명정대하게 위치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여하튼, 시스템에 평행하는 유토피아적인 사고들로 길을 읽지 않았다면, 오늘날 다른 방식을 가정하기는 힘들것이다. 후자의 접근에 있어서 첫번째 단계는시스템을 무효화시킬수 있는 호의적인 믿음에서, 도피하고자 시도하는 것으로부터 같이 있는 새로운 시스템은 언제나 거짓 전선이다. 사실 이것이 할 수 있는 전부는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사실 할 수 있는 전부는 거부하는 것이다. (이상주의자의 순수주의)와 결정적으로 머지않아 그 자체로 모델화되는적들에 의해 위험에 처해지게 되는 것이다. 이 평행주의는 오직 한방향으로만 작동된다.우리는 양방향으로 작동해야된다고 믿는 반면, 이것은 상처입은자의 한 방향만을 건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무한대에서의 고속의 평행선의 만남의 위험성은우리에게 차라리 유한대에서 서로가 평인상태로를 인정하면서 유지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주장하는 듯 하다.이렇게 가정되었을때,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의 상황에서 우리의 태도는 무엇인가?프랑스에서 영화의 대부분은 , 대부분의 책이나 잡지에서 처럼,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안에서자본주의 경제구조에 의해서 생산되고, 분배된다. 사실, 엄격히 말해서, 아무리 진취적인 것을 채택해서 시도한다고 해도, 우리는 다 이렇다. 이런 상태이므로, 우리가 물어야 하는 질문은 이것이다: 어떤 영화, 책, 그리고 잡지가 자유롭게, 방해받지 않는 문장을 쓴 이데올로기를 허용하며, 투명하게 전달하고, 선택된 언어로서 작용할 수 있을까?그리고 어떠한 시도가 그것을 다시 되돌리고, 반성하고, 그것들을 막아냄으로서, 그 메카니즘을 '폭로해서 분명히 눈에 보이도록 할 수 있을까?b.우리가 연기하고 있는 장소는 영화의 장이다. (Cahiers는 영화잡지), 그리고우리 연구의 분명한 목적은 영화의 역사이다.그것이 어떻게 기획되고, 제조되며,배분되고, 이해되는가 말이다.오늘날의 영화는 무엇인가? 이것은 적절한 질문의다; 아니다. 전에 그랬을 법하게도: 영화는 과연 시네마는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이론과 지식의 실체가 현재의 공허한 개념과 말들을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해 진화해나갈때 까지 이론의 실체, 지식의 실체에대해서 질문을 던질 수 없을 것이다.영화잡지로서 질문은 역시 이것이다: 어떤 일들이 영화로 구성된 범위들에서 행해져야 하는가?그리고 특히 Cahiers로서는: 이 부분에서 우리의 특별히 해야하는 기능은 무엇인가?우리를 달느 잡지와 구별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영화들.영화는 무엇인가? 한편으로는 이것은 특별한 상품인데, 주어진 경제관계 시스템속에서, 자본주의자에게는 돈으로 이해되는 생산하기 위한 노동과 연관지어서 제조되고 있다. 이런 상황은 독립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던가, 'new cinema'를 지향하는 사람들 조차 똑같은 목적을 위해특정한 수의 노동자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이것은 감독에게조차 , 그가 Moullet던지 Oury던지 상관없이 영화노동자 분석의 마지막 단계로 적용된다.) 이것은 시장의 법칙에 의해 좌우되는 매표 수입이나, 계약 등의교환가치를 지니고 있는 상품으로 변형이 된다. 다른한편, 이런 시스템속의 물질적 상품화의결과로서, 이것은 또한 시스템상의 이데올로기적이 상품화가 되는 것이다. 프랑스의 경우그것은 자본주의를 뜻하는 것이다.
어떤 영화관계자라도, 단지 자신의 개인적인 노력으로, 그의 영화의 생산과 분배를 관장하는 경제관계를 바꿀 수 있을 수는 없다. (내용과 형식상으로 혁명적인 영화로서 출발한 영화감독이랄지라도 경제구조상의 순식간의 변화나 급진적인 변혁을 가져올 수는 없다는 것은 여러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물론 훼손시키거나, 편향시킬지는 몰라도 그것을 무효화시거나, 그것의 구조자체를 심각하게전복시킬 수는 없다. 고다르가 최근 자신은 이러한 구조속에서 일하기를 그만두고 싶다고 언급한 것은 그 어떤 조직도 그가 피하기를 원했던 것들의 투영이라는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자금은 더이상 프랑스에서 조달되지 않는다고 해도 영국, 이태리, 미국등이 그것을 맡게 된다. 영화가 더이상 독점적인 배급에의해 시장에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또다른독점인 코닥의 필름으로 영화를 찍는 것이다. ) 왜냐하면 모든 영화는 경제시스템의 일부분일 수 밖에 없고, 영화와 예술이 이데올로기 상의 하나의 가지들이기에, 이데올로기의 시스템안의 일부분일 수 밖에 없다. 어느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고, 마치 퍼즐조각들처럼 어디선가할당된 일부분의 몫이 있는 것이다. 이 시스템은 그 본질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아니 사실은 그러한 이유때문에 이 모든 조각들이 다 맞춰졌을때는 그림이 확실하게드러나는 것이다. 그러한 모든 영화감독들이 다 똑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반응들은각기 다르다. 아무리 그들을 조건짓고 있는 이데올로기 자체를 바꾼다고 슬로건들을 내세운 속에서 그 어떤 마술적인 변혁을 기대하지 않으면서 천천히,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것이 바로 비평의 해야 할 일인 것이다. 내가 나중에 다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몇가지를 집고 넘어가자면: 모든 영화는 정치적이고, 그것을 생산해내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결정이 된다. (아니면, 그곳에서이데기올로기가 생성되든지, 그 줄기는 같은 것이다.) 영화는 더더욱 철저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결정되어있는데, 왜냐하면 다른 예술들이나 이데올로기 시스템과는 달리 문학을 출판하듯이이것은 강력한 경제영향력을 결집시키기 때문이다. (책이라는 상품이 되기까지 유통과, 광고, 그리고 판매의 단계에 이르기까지 이 둘은 같은 역할을 한다.)확실히, 영화는 현실을 복제하고 잇다.: 이것은 카메라와 필름 뭉치가 이데올고기를 위한 것이라는점이다. 그러나 영화만들기에 있어, 도구들과 기술들은 그자체의 현실의 일부분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현실이란 지배 이데올로기의 표현에 불과하지 않다. 이렇게 볼때, 전통적인 영화이론들, 즉, 카메라는 세상이라는 구체적인 현실의 세계를 이해하고, 혹은 거기에 스며들게 하는 공명정대한기구라는 견해는 상당히 반동적인 것이다. 사실 카메라가 잡아내는 것은 막연하고,공식화되지 않고,이론화되지 않고, 생각이 없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세계인 것이다. 카메라는 세상이 그자체와 소통하는 하나의 언어인 셈이다. 그들은 그것들의 이데올로기를 구성해내는데, 이데올로기에 의해 걸러진 후에 그것이 경험되는 세상 그대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좀더 자세히 알튀세르가 정의하듯이, 이데올로기란 지각되고,받아들여지고, 문화적인 대상들로인해 고통을 겪게된다. 이런과정은 근본적으로 인간에게 영향을 끼치지만, 그들은 이과정을 깨닫지 못한다. 인간이 이데올로기속에서 표현하는 것은 그들존재에 대한 진실된 관계성이 아니라, 어떻게 존재의 조건에 대해서 반응하느냐인 것이다; 그것이진정한 관계와 상상속의 관계에 대한 전제 조건인 셈이다.) 그래서, 우리가 영화를 만든다고 할때, 그 첫번째 샷에서부터 우리는 사물들을 재현해재는 요구에 의해 방해를 받게 되는데, 그것은그 존재 자체로서의 재현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에 의해 굴절된 상으로의 재현을 말하게 된다.이것은 제작의 모든 단계에서 나타난다: 주제, '스타일', 형식, 의미, 스토리전개 전통; 모든것이 일반적인 이데올로기 담론을 강화하고 있다. 영화는 그자체에서 자체로 드러나고, 말하고,그 자체에 대해 배우는 이데올로기이다. 우리가 일단 영화를 이데올로기의 도구로서 전화시키는시스템의 본질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영화감독의 제일 임무가 영화의 소위 말하는, 현실의 재현이라는 것을 드러내 보이고, 그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가 영화와 이데올로기 기능간의 관계를 분열시키고, 가능하면 절단시킬수 있는 기회가 일을 것이다. 오늘날 가장 중요한 영화의기능은 그들이 이것을 하느냐, 아니면 하지 않느냐에 있는 것이다.a. 첫번째이면서도 가장 거대한 범주는 철저하게 지배 이데올로기에 물들어 있는데 그 방식이 너무도 깨끗하고 순수한 형태여서, 영화 제작자들 조차도 그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영화들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단순히 소위 '상업'영화만을일컫지 않는다. 모든 범주에 있어서 대부분의 영화들이 그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자각하지 않지만 도구이다. 그 영화가 상업적이든, 야심작이든, 현대적이든, 전통적이든, 예술극장에서 상영되든, 작은 영화관이든, 고전영화에 속하든지, 젊은 영화에 속하든지, 거의대부분이 다 똑같은 이데올로기를 비벼놓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모든 영화가 상품이고 그래서 교환의 대상이며, 그들의 담론이 숨김없이 정치적이다, 그래서 정치적 영화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은 정의상 정치적인 영화를구성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와 영화의 합병은 관객과 경제적인 반응이 한가지로 그것도 같은 것으로 귀결된다는점에서 반영된다. 직접적인 정치적 실습과의 연속성에서, 이데올로기 실습은 담론으로 강화되는사회적 요구를 재정비하게 된다. 이것은 가설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확립된 사실이다. 이데올로기는 그자체에게 말을 한다;이것은 질문을 하기도 전에 이미 모든 해답을 가지고 있다. 확실이 대중의 요구와 같은 것들이 있긴 하지만, 그러나 대중이 원하는 것'이라는 것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원한는 것이란의미인 것이다. 대중과, 대중이 워하는 것이란 개념은 이데올로기가 그것을 합리화하고 그것을영속시키기 위해 창조해낸 것이다. 그리고 대중은 오직 이데올로기의 양식화된 사고를 통해서만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폐쇄회로로, 끊임없이 똑같은 환상을 반복해 내고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예술적 형태의 단계에서도 똑같다. 이 영화는 완전히 현실을 묘사하는확립된 체계만을 받아들인다: '브르조아 사실주의' 그리고 보수적인 계략들의 합: 생명, 인간성, 상식 등의 맹목적인 믿음들, 축복받은 무식함 즉, 모든 단계의 생산의 단계에서 나타나는 묘사의 개념이 어딘가 잘못되었것이라는 그래서, 우리한테는 매표소의 판매수익보단느 상업적이라는개념이 더욱더 영화에 있어서 측정기준이 되는 것이다. 어떤 영화도 이데올로기에 반해서, 혹은 관객의 신비화에 반해서 삐걱거릴수 없다. 관객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일상생활의 이데올로기와영화 스크린 상에 나타난 이데올로기와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참으로 안심이되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영화 평론가에게는 이데올로기 시스템과 그것의 상품이 하나로 통합되는 것을 보는 것은 상호 보완적으로 유용한 것이다. 어찌하여 영화가 관객에게 독백이되는지, 예를 들어 Melville, Oury, Lelouch와 같은 감독의 성공적인 영화를 살펴보더라도이데올로기가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것을 공부하는 것은 중요하다.b. 두번째 담론은 그 자신의 이데올로기 동화를 두가지 측면에서 공격하는 영화들이다.첫번째로 직접적인 정치적 행동에 의해, '기의'의 단계에서 , 그들은 직젖ㅂ적으로 정치적인 주제들을 다룬다. '다룬다'라는 말은 여기에서 능동의 의미이다.: 그들은 단순히 이슈를 토론하고, 반복하고,부연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를 공격하기 위해 사용한다.(이것은 이데올로기적인 행동의 정반대인 이론적인 행동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러한 행동은이것이 전통적인 현실의 재현방식을 파괴하는 것과 연관있을 경우에만 정치적으로 효과가있게 된다. 형식의 단계에서는, 화해되지 않고, The Edge and Eath in Revolt, 묘사에 대한 개념에 대한 저항과 그것을 구체화하는 전통에 대한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다.우리는 오직 양측의 행동, 즉 '기표'와 '기의'만이 만연해 있는 이데올로기에 저항해서 작동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경제/정치적이고 공식적인 행동이결합되어야 한다.
[[[[[c.똑같은 이중작동의, 그러나 거슬려서 작동하는 또하나의 담론이 있다. 그 내용은 명백하게 정치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 형태를 거쳐서 비판을 거쳐서 작동되기에 몇몇은 꽤 철저하게작동되고 있다. 이 범주에 Mediterranee, the Belboy, Persona..등이 속해 있는 것이다.]]]
[[[[Cahiers에게는 영화 (b와c)는 시네마에게는 필수적이고 잡지의 주요 주제가 되어야 한다.]]
d.네번째의 경우: 이 형화들은, 요즘들어서 많이 들어나고 있는, 명백하게 정치적인 내용을포함하고 있다.(z는 마치 청치학의 재현이 처음부터 끝까지 끊임없이 이데올로기적인것처럼 최고의 예가 아니다; 좀 더 나은 예가 Le Temps de Vivre가 될 것이다.)그러나 효과적으로 그 자신이 속해 있는 이데올로기 시스템ㅇ르 비판하고 있지 못한다. 왜냐한면 물을 필요도 없이그것의 언어와 이미지가 그 이데올로기 속에 깊숙히 박혀 있기 때문이다.이것이 비평가에게 이런 영화들에게서 의도된 정치적 비판의 효과성ㅇ르 검증하는 것이중요한 일이 되게 하였다. 그들이 자신들이 비난하려고 했던 것들을 오히려 표현하고, 보충하고, 강화하였는가? (a를 보라)e.다섯번째: 처음에 보기에는 확실이 이데올로기 안에 속해 있는 것 같고 그 통치안에있는 것 같은 영화가, 그러나 단지 애매한 방식으로 그랬던 것이 밝여지는 영화가 있다. 이것들은 처음에는 온건하게 비판하는 회유적인 솔직한 반동인, 혁신적이지 않은 관점에서 출발했지만 계속 꾸준히 작업을 해서 , 시작점과 끝지점 사이에 엄청난 전위와 눈에 띨 정도의간극이 있는 것들이다. 우리는 일관되지 않고, 중요하지 않은, 감독이 지배 이데올로기를 의식적으로 사용하고, 그러나 절대적으로 직설적으로 말하는 영화는 무시한다. 우리가 말하는 영화는 그것에 봉사하고 코스를 이탈하게 하는 이데올로기에 반해서 방해물을 던져버리는 것이다. 영화적인 틀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보게 하지만 , 또한 그것을 보여줌으로서 규탄하는 것이다. 두가지의 순간들이 들어있는 틀을 살펴보자:하나는 어느정도의 제한안에서 하나는 그것을 지니고 있고, 또하나는 그것을 거스르는 것이다.내적 비판은 솔기부분에서 영화가 갈라짐이 일어난다. 어떤 사람이 어떤 증상들을 찾으며,영화를 삐딱하게 본다면 그 사람은 이것이 갈라진 틈 투성이 인것을 볼 것이다: 이데기올로기적으로아무 해가 없는 영화속에서 있지도 않은 내적 긴장감으로 분리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데올로기는 이 테스트에 점점 종속되는 것이다. 더이상 존재에 독립적이지 못한다: 그것은영화에 의해 재현이 된다. 이것은 바로 많은 헐리웃 영화들의 상황이다. 예를 들어 시스템과이데올로기가 완벽하게 통합되었지만 결국 부분적으로 속에서부터 시스템이 와해되는 것이다. 우리는 영화감독들이 그의 영화의 언어로서 다시 재현함으로서 이데올로기를 부식시킬 수 있는방섭을 찾아야만 한다: 그가 단순히 그의 영화를 자유주의 편향ㄷ뇌 한방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이데올로기의 의해 즉시 만회하고 말것이다; 그 반면에, 그가 그것을 이미지의 더 깊은 단계까지생각하고 깨닫는다면 그것은 더욱 파괴적인 힘이 될 가능성이 있다. 물론 그가 이데올로기 자체를깨뜨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단순히 그의 영화속에서 반영할 수는 있다. (Ford, Dreyer, Rosselini의 영화와 같은 예에서 처럼.) 영화의 범주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우리는 절대적으로 작금의 마녀사냥에 동조하고 싶은 의도는 없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름의 믿음에 대한 신화를가지고 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비판하고, 물론 그런 것이 글로써 쓰여질 의도는 없지만, 그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은 부적절하고 주제넘은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작동되고있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f. 'live cinema'(cinema direct)라고 불리는 영화 종류, 그룹 (하나의 큰 그룹이나 두개의 그룹들).이들은 정치적 이벤트나 반성으로부터 나왔는데, 그들과 비정치적인 영화와의 명확한 구분이 없다.왜냐하면 그들은 영화의 전통적인 이데올로기적으로 조작된 재현의 방식에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광부들의 투쟁은 Les Grandes Familles의 스타일과 같이 찍을 것이다.이런 영화들의 감독들은 마치 그들이 내러티브 전통의 이데올로기적인 필터를 제거해버리면현실자체가 진실된 형식으로 굴복할 것이라는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환상들에 사로 잡혀 있다. ( 공적인 아름다움에 강조점을 둔, 중심 생각으로 구성된 지배적인 생각들, 연출기법이나 건축양식)사실 그렇게 함으로써, 오직 하나의 필터는 제거 할 수 있지만, 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안된다.현실은 그 안에 이론과 진실의 자기 인식의 숨겨진 핵을 마치 과일 속에 들어있는 돌과 같이 가지고있다. (마르크스주의는 '현실'과 '인지된'사물간의 구별에서 이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Leacock의 Chief와 the May films의 a good number를 비교해 보라.이것은 왜 시네마 디렉트의 옹호자들이 그의 역할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리고 마치 다른 사람들이 위해 기술의생산품에 대해서 사용하듯이 그것의 성공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똑같은 이상주의적인 용어들을 사용하가의 이유이다. : '정밀함', '삶의 경험에 대한 느낌', '강한 진실의 섬광','생생한 순간들''우리가 영화를 보고 있는 느낌의 폐기'그리고 마지막으로: 환상.이것은 '보는 것이 이해하는 것이다'라는 마술적인 개념이다: 이데올로기는 그자체가 진실로 무엇인지가 드러나지 않기 위해서 , 자신을 비난하지 않게 단순히 응시하게끔 펼쳐 보여준다.g. 'live cinema'의 다른 종류. 여기 '외면을 통해 보는 것'이 카메라라는 생각에 만족하지 않는감독이 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영화속의 구체적인 물건들에 능동적인 역할을 부여함으로서 기본적인 묘사의 문제를 문제를 공격한다. 그럼으로써 이것은 생산적인 의미가 되고, (이데올로기)외부에서 생산되는 의미의 수동적인 저장소가 아니게 된다. :
[[[[[[Le Regne du Jour, La Rentree des Usines Wonder ]]]]
비평적 기능
그러면, 우리의 비병적인 작업의 분야:이데올로기안에서 이런 영화들, 그리고 그들의 그것과의 다른 관계들. 여기서부터 정확하게 정의된분야가 네가지 기능으로 나온다:1. 범주 a의 경우: 그들의 맹목적인 분야를 드러내라; 어떻게 그들이 이데올로기에 의해 완전히결정되었고, 틀이 잡혔는지에 대해서;2. 범주 b,c 그리고 g의 경우 두가지의 단계로 읽고, 기표와 기의의 단계에서 어떻게 중심적으로기능을 하고 있는지 드러내라.3. 범주 d와 f의 경우 기표에 대한 기술적이고 이론적인 작업이 부재되었을 경우 기의(정치적인 주제들)가 항상 약화되고, 무해하게 되는지를 보여라.4. 그룹 e의 경우 영화와 영화가 작동하는 방식에 의한 이데올로기에 의해 생성되는 간극을 지적하고, 그것들의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라.
(논평, 해설, 해독) 고찰을 위한 , (영화 칼럼류와 같은) [[[[방대한 [[[[[]]]]]]
이든지 비평적인 수행을 하기 위한 여유는 없다. 그것은 영화제작을 주관하는 엄격한 사실분석일 것이다. 손에 잡힐 듯한 또하나의 요소인, (경제적 상황, 이데올로기, 요구 그리고 반응) 그리고 그 속에 나타나는 의미들과 형태들에 대한 분석이다.변덕스럽과 곧 사라질 영화에 대한 글쓰기의 전통은 그것이 많은 것 뿐만 아니라 끈질기기까지 하다.그리고 오즐날의 영화분석은 아직도 대부분 이상주의적 전제들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다.이들은 오늘날 더 나아가 떠돌아 다니는데, 그러나 아직도 기본적으로 이 방식은 경험주의적이다. 이것은 영화의 기표적인 구조, 이것의 형식적인 조직이라는 물질적인 요소들로 돌아가는 기초적인 단계를 통해왔다. 이것의 첫번째 단계는 자신의 글에서 그에 대해 반대되는 글들이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부정할 수 없이 앙드레 바쟁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구조주의적언어학을 기본으로하는 접근방식을 따른다.(거기에는 우리가 빠지는 두가지 기본적인 덫이 있는데,그중 하나가 현상학적인 실증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기계적인 유물론이다.) 비평이 이 단계를넘어서게 되면, 그 다음 단계로 가야된다. 우리에게는 진보의 유일한 가능한 선은 20년대 러시아감독들의 이론적 저작들을 이용하는 것이다.(그중에소도 아이젠슈타인 ) 영화의 비평적 이론, 즉, 을 적용하고 정교화하기 위해서
과학적 비평은 범위와 방법론을 명확히 규정해야만 한다. 이것은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상황에 대한 자각과 제안된 학문의 범위에 대한 엄격한 분석그리고 작업을 필요하게 하면서,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과 작업을 완수하기 위한 특볋난 기능들을 함의하고 있다.
Cahiers du Cinema에서 우리는 우리의 입장과 목표에 대한 전세계적인 분석을 실시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완전 무의 상태에서부터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분석의 조각들이 우연인 듯, 막연한 상태의 최근 우리가 출판했던 것들 (기사, 논설,토론, 독자에 대한 회답, 편지) 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것은 우리의 독자들도 우리 못지 않게 둘로 나눌수 없는 비판적 실천과 그것의 장을 연결시키는명료한 이론적 토대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프로그램화와 혁명적인 계획들 그리고 선언들은 그 자체들로서 종국을 맞기가 쉬기에 우리가 피하려고 하는 함정이다. 우리의 목표는 우리가 하고 하고자 하는 것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고 있는것,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드러내는 것인데, 이것은 현재상황에 대한분석없이는 불가능한 것들이다.
어디에?a.첫번째로 우리가 처해있는 장소이다. Cahiers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우리가 같이 하는 일의 결과중 하나는 잡지를 통해서 보여진다. 잡지라는 특정한생산물은 누군가 그것을 쓰고, 누군가 그것을 출판해 내고, 그리고 누군가는 그것을 읽게되는 특정한 양의 노동과 관련이 되게 된다. 우리는 이런 상품의 본성이 자본주의 출판계의 경제 시스템(출판 양식, 발행부수의 범위 등등)속에서 공명정대하게 위치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여하튼, 시스템에 평행하는 유토피아적인 사고들로 길을 읽지 않았다면, 오늘날 다른 방식을 가정하기는 힘들것이다. 후자의 접근에 있어서 첫번째 단계는시스템을 무효화시킬수 있는 호의적인 믿음에서, 도피하고자 시도하는 것으로부터 같이 있는 새로운 시스템은 언제나 거짓 전선이다. 사실 이것이 할 수 있는 전부는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사실 할 수 있는 전부는 거부하는 것이다. (이상주의자의 순수주의)와 결정적으로 머지않아 그 자체로 모델화되는적들에 의해 위험에 처해지게 되는 것이다. 이 평행주의는 오직 한방향으로만 작동된다.우리는 양방향으로 작동해야된다고 믿는 반면, 이것은 상처입은자의 한 방향만을 건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무한대에서의 고속의 평행선의 만남의 위험성은우리에게 차라리 유한대에서 서로가 평인상태로를 인정하면서 유지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주장하는 듯 하다.이렇게 가정되었을때,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의 상황에서 우리의 태도는 무엇인가?프랑스에서 영화의 대부분은 , 대부분의 책이나 잡지에서 처럼,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안에서자본주의 경제구조에 의해서 생산되고, 분배된다. 사실, 엄격히 말해서, 아무리 진취적인 것을 채택해서 시도한다고 해도, 우리는 다 이렇다. 이런 상태이므로, 우리가 물어야 하는 질문은 이것이다: 어떤 영화, 책, 그리고 잡지가 자유롭게, 방해받지 않는 문장을 쓴 이데올로기를 허용하며, 투명하게 전달하고, 선택된 언어로서 작용할 수 있을까?그리고 어떠한 시도가 그것을 다시 되돌리고, 반성하고, 그것들을 막아냄으로서, 그 메카니즘을 '폭로해서 분명히 눈에 보이도록 할 수 있을까?b.우리가 연기하고 있는 장소는 영화의 장이다. (Cahiers는 영화잡지), 그리고우리 연구의 분명한 목적은 영화의 역사이다.그것이 어떻게 기획되고, 제조되며,배분되고, 이해되는가 말이다.오늘날의 영화는 무엇인가? 이것은 적절한 질문의다; 아니다. 전에 그랬을 법하게도: 영화는 과연 시네마는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이론과 지식의 실체가 현재의 공허한 개념과 말들을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해 진화해나갈때 까지 이론의 실체, 지식의 실체에대해서 질문을 던질 수 없을 것이다.영화잡지로서 질문은 역시 이것이다: 어떤 일들이 영화로 구성된 범위들에서 행해져야 하는가?그리고 특히 Cahiers로서는: 이 부분에서 우리의 특별히 해야하는 기능은 무엇인가?우리를 달느 잡지와 구별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영화들.영화는 무엇인가? 한편으로는 이것은 특별한 상품인데, 주어진 경제관계 시스템속에서, 자본주의자에게는 돈으로 이해되는 생산하기 위한 노동과 연관지어서 제조되고 있다. 이런 상황은 독립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던가, 'new cinema'를 지향하는 사람들 조차 똑같은 목적을 위해특정한 수의 노동자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이것은 감독에게조차 , 그가 Moullet던지 Oury던지 상관없이 영화노동자 분석의 마지막 단계로 적용된다.) 이것은 시장의 법칙에 의해 좌우되는 매표 수입이나, 계약 등의교환가치를 지니고 있는 상품으로 변형이 된다. 다른한편, 이런 시스템속의 물질적 상품화의결과로서, 이것은 또한 시스템상의 이데올로기적이 상품화가 되는 것이다. 프랑스의 경우그것은 자본주의를 뜻하는 것이다.
어떤 영화관계자라도, 단지 자신의 개인적인 노력으로, 그의 영화의 생산과 분배를 관장하는 경제관계를 바꿀 수 있을 수는 없다. (내용과 형식상으로 혁명적인 영화로서 출발한 영화감독이랄지라도 경제구조상의 순식간의 변화나 급진적인 변혁을 가져올 수는 없다는 것은 여러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물론 훼손시키거나, 편향시킬지는 몰라도 그것을 무효화시거나, 그것의 구조자체를 심각하게전복시킬 수는 없다. 고다르가 최근 자신은 이러한 구조속에서 일하기를 그만두고 싶다고 언급한 것은 그 어떤 조직도 그가 피하기를 원했던 것들의 투영이라는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자금은 더이상 프랑스에서 조달되지 않는다고 해도 영국, 이태리, 미국등이 그것을 맡게 된다. 영화가 더이상 독점적인 배급에의해 시장에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또다른독점인 코닥의 필름으로 영화를 찍는 것이다. ) 왜냐하면 모든 영화는 경제시스템의 일부분일 수 밖에 없고, 영화와 예술이 이데올로기 상의 하나의 가지들이기에, 이데올로기의 시스템안의 일부분일 수 밖에 없다. 어느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고, 마치 퍼즐조각들처럼 어디선가할당된 일부분의 몫이 있는 것이다. 이 시스템은 그 본질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아니 사실은 그러한 이유때문에 이 모든 조각들이 다 맞춰졌을때는 그림이 확실하게드러나는 것이다. 그러한 모든 영화감독들이 다 똑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반응들은각기 다르다. 아무리 그들을 조건짓고 있는 이데올로기 자체를 바꾼다고 슬로건들을 내세운 속에서 그 어떤 마술적인 변혁을 기대하지 않으면서 천천히,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것이 바로 비평의 해야 할 일인 것이다. 내가 나중에 다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몇가지를 집고 넘어가자면: 모든 영화는 정치적이고, 그것을 생산해내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결정이 된다. (아니면, 그곳에서이데기올로기가 생성되든지, 그 줄기는 같은 것이다.) 영화는 더더욱 철저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결정되어있는데, 왜냐하면 다른 예술들이나 이데올로기 시스템과는 달리 문학을 출판하듯이이것은 강력한 경제영향력을 결집시키기 때문이다. (책이라는 상품이 되기까지 유통과, 광고, 그리고 판매의 단계에 이르기까지 이 둘은 같은 역할을 한다.)확실히, 영화는 현실을 복제하고 잇다.: 이것은 카메라와 필름 뭉치가 이데올고기를 위한 것이라는점이다. 그러나 영화만들기에 있어, 도구들과 기술들은 그자체의 현실의 일부분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현실이란 지배 이데올로기의 표현에 불과하지 않다. 이렇게 볼때, 전통적인 영화이론들, 즉, 카메라는 세상이라는 구체적인 현실의 세계를 이해하고, 혹은 거기에 스며들게 하는 공명정대한기구라는 견해는 상당히 반동적인 것이다. 사실 카메라가 잡아내는 것은 막연하고,공식화되지 않고,이론화되지 않고, 생각이 없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세계인 것이다. 카메라는 세상이 그자체와 소통하는 하나의 언어인 셈이다. 그들은 그것들의 이데올로기를 구성해내는데, 이데올로기에 의해 걸러진 후에 그것이 경험되는 세상 그대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좀더 자세히 알튀세르가 정의하듯이, 이데올로기란 지각되고,받아들여지고, 문화적인 대상들로인해 고통을 겪게된다. 이런과정은 근본적으로 인간에게 영향을 끼치지만, 그들은 이과정을 깨닫지 못한다. 인간이 이데올로기속에서 표현하는 것은 그들존재에 대한 진실된 관계성이 아니라, 어떻게 존재의 조건에 대해서 반응하느냐인 것이다; 그것이진정한 관계와 상상속의 관계에 대한 전제 조건인 셈이다.) 그래서, 우리가 영화를 만든다고 할때, 그 첫번째 샷에서부터 우리는 사물들을 재현해재는 요구에 의해 방해를 받게 되는데, 그것은그 존재 자체로서의 재현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에 의해 굴절된 상으로의 재현을 말하게 된다.이것은 제작의 모든 단계에서 나타난다: 주제, '스타일', 형식, 의미, 스토리전개 전통; 모든것이 일반적인 이데올로기 담론을 강화하고 있다. 영화는 그자체에서 자체로 드러나고, 말하고,그 자체에 대해 배우는 이데올로기이다. 우리가 일단 영화를 이데올로기의 도구로서 전화시키는시스템의 본질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영화감독의 제일 임무가 영화의 소위 말하는, 현실의 재현이라는 것을 드러내 보이고, 그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가 영화와 이데올로기 기능간의 관계를 분열시키고, 가능하면 절단시킬수 있는 기회가 일을 것이다. 오늘날 가장 중요한 영화의기능은 그들이 이것을 하느냐, 아니면 하지 않느냐에 있는 것이다.a. 첫번째이면서도 가장 거대한 범주는 철저하게 지배 이데올로기에 물들어 있는데 그 방식이 너무도 깨끗하고 순수한 형태여서, 영화 제작자들 조차도 그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영화들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단순히 소위 '상업'영화만을일컫지 않는다. 모든 범주에 있어서 대부분의 영화들이 그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자각하지 않지만 도구이다. 그 영화가 상업적이든, 야심작이든, 현대적이든, 전통적이든, 예술극장에서 상영되든, 작은 영화관이든, 고전영화에 속하든지, 젊은 영화에 속하든지, 거의대부분이 다 똑같은 이데올로기를 비벼놓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모든 영화가 상품이고 그래서 교환의 대상이며, 그들의 담론이 숨김없이 정치적이다, 그래서 정치적 영화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은 정의상 정치적인 영화를구성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와 영화의 합병은 관객과 경제적인 반응이 한가지로 그것도 같은 것으로 귀결된다는점에서 반영된다. 직접적인 정치적 실습과의 연속성에서, 이데올로기 실습은 담론으로 강화되는사회적 요구를 재정비하게 된다. 이것은 가설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확립된 사실이다. 이데올로기는 그자체에게 말을 한다;이것은 질문을 하기도 전에 이미 모든 해답을 가지고 있다. 확실이 대중의 요구와 같은 것들이 있긴 하지만, 그러나 대중이 원하는 것'이라는 것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원한는 것이란의미인 것이다. 대중과, 대중이 워하는 것이란 개념은 이데올로기가 그것을 합리화하고 그것을영속시키기 위해 창조해낸 것이다. 그리고 대중은 오직 이데올로기의 양식화된 사고를 통해서만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폐쇄회로로, 끊임없이 똑같은 환상을 반복해 내고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예술적 형태의 단계에서도 똑같다. 이 영화는 완전히 현실을 묘사하는확립된 체계만을 받아들인다: '브르조아 사실주의' 그리고 보수적인 계략들의 합: 생명, 인간성, 상식 등의 맹목적인 믿음들, 축복받은 무식함 즉, 모든 단계의 생산의 단계에서 나타나는 묘사의 개념이 어딘가 잘못되었것이라는 그래서, 우리한테는 매표소의 판매수익보단느 상업적이라는개념이 더욱더 영화에 있어서 측정기준이 되는 것이다. 어떤 영화도 이데올로기에 반해서, 혹은 관객의 신비화에 반해서 삐걱거릴수 없다. 관객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일상생활의 이데올로기와영화 스크린 상에 나타난 이데올로기와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참으로 안심이되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영화 평론가에게는 이데올로기 시스템과 그것의 상품이 하나로 통합되는 것을 보는 것은 상호 보완적으로 유용한 것이다. 어찌하여 영화가 관객에게 독백이되는지, 예를 들어 Melville, Oury, Lelouch와 같은 감독의 성공적인 영화를 살펴보더라도이데올로기가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것을 공부하는 것은 중요하다.b. 두번째 담론은 그 자신의 이데올로기 동화를 두가지 측면에서 공격하는 영화들이다.첫번째로 직접적인 정치적 행동에 의해, '기의'의 단계에서 , 그들은 직젖ㅂ적으로 정치적인 주제들을 다룬다. '다룬다'라는 말은 여기에서 능동의 의미이다.: 그들은 단순히 이슈를 토론하고, 반복하고,부연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를 공격하기 위해 사용한다.(이것은 이데올로기적인 행동의 정반대인 이론적인 행동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러한 행동은이것이 전통적인 현실의 재현방식을 파괴하는 것과 연관있을 경우에만 정치적으로 효과가있게 된다. 형식의 단계에서는, 화해되지 않고, The Edge and Eath in Revolt, 묘사에 대한 개념에 대한 저항과 그것을 구체화하는 전통에 대한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다.우리는 오직 양측의 행동, 즉 '기표'와 '기의'만이 만연해 있는 이데올로기에 저항해서 작동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경제/정치적이고 공식적인 행동이결합되어야 한다.
[[[[[c.똑같은 이중작동의, 그러나 거슬려서 작동하는 또하나의 담론이 있다. 그 내용은 명백하게 정치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 형태를 거쳐서 비판을 거쳐서 작동되기에 몇몇은 꽤 철저하게작동되고 있다. 이 범주에 Mediterranee, the Belboy, Persona..등이 속해 있는 것이다.]]]
[[[[Cahiers에게는 영화 (b와c)는 시네마에게는 필수적이고 잡지의 주요 주제가 되어야 한다.]]
d.네번째의 경우: 이 형화들은, 요즘들어서 많이 들어나고 있는, 명백하게 정치적인 내용을포함하고 있다.(z는 마치 청치학의 재현이 처음부터 끝까지 끊임없이 이데올로기적인것처럼 최고의 예가 아니다; 좀 더 나은 예가 Le Temps de Vivre가 될 것이다.)그러나 효과적으로 그 자신이 속해 있는 이데올로기 시스템ㅇ르 비판하고 있지 못한다. 왜냐한면 물을 필요도 없이그것의 언어와 이미지가 그 이데올로기 속에 깊숙히 박혀 있기 때문이다.이것이 비평가에게 이런 영화들에게서 의도된 정치적 비판의 효과성ㅇ르 검증하는 것이중요한 일이 되게 하였다. 그들이 자신들이 비난하려고 했던 것들을 오히려 표현하고, 보충하고, 강화하였는가? (a를 보라)e.다섯번째: 처음에 보기에는 확실이 이데올로기 안에 속해 있는 것 같고 그 통치안에있는 것 같은 영화가, 그러나 단지 애매한 방식으로 그랬던 것이 밝여지는 영화가 있다. 이것들은 처음에는 온건하게 비판하는 회유적인 솔직한 반동인, 혁신적이지 않은 관점에서 출발했지만 계속 꾸준히 작업을 해서 , 시작점과 끝지점 사이에 엄청난 전위와 눈에 띨 정도의간극이 있는 것들이다. 우리는 일관되지 않고, 중요하지 않은, 감독이 지배 이데올로기를 의식적으로 사용하고, 그러나 절대적으로 직설적으로 말하는 영화는 무시한다. 우리가 말하는 영화는 그것에 봉사하고 코스를 이탈하게 하는 이데올로기에 반해서 방해물을 던져버리는 것이다. 영화적인 틀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보게 하지만 , 또한 그것을 보여줌으로서 규탄하는 것이다. 두가지의 순간들이 들어있는 틀을 살펴보자:하나는 어느정도의 제한안에서 하나는 그것을 지니고 있고, 또하나는 그것을 거스르는 것이다.내적 비판은 솔기부분에서 영화가 갈라짐이 일어난다. 어떤 사람이 어떤 증상들을 찾으며,영화를 삐딱하게 본다면 그 사람은 이것이 갈라진 틈 투성이 인것을 볼 것이다: 이데기올로기적으로아무 해가 없는 영화속에서 있지도 않은 내적 긴장감으로 분리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데올로기는 이 테스트에 점점 종속되는 것이다. 더이상 존재에 독립적이지 못한다: 그것은영화에 의해 재현이 된다. 이것은 바로 많은 헐리웃 영화들의 상황이다. 예를 들어 시스템과이데올로기가 완벽하게 통합되었지만 결국 부분적으로 속에서부터 시스템이 와해되는 것이다. 우리는 영화감독들이 그의 영화의 언어로서 다시 재현함으로서 이데올로기를 부식시킬 수 있는방섭을 찾아야만 한다: 그가 단순히 그의 영화를 자유주의 편향ㄷ뇌 한방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이데올로기의 의해 즉시 만회하고 말것이다; 그 반면에, 그가 그것을 이미지의 더 깊은 단계까지생각하고 깨닫는다면 그것은 더욱 파괴적인 힘이 될 가능성이 있다. 물론 그가 이데올로기 자체를깨뜨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단순히 그의 영화속에서 반영할 수는 있다. (Ford, Dreyer, Rosselini의 영화와 같은 예에서 처럼.) 영화의 범주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우리는 절대적으로 작금의 마녀사냥에 동조하고 싶은 의도는 없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름의 믿음에 대한 신화를가지고 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비판하고, 물론 그런 것이 글로써 쓰여질 의도는 없지만, 그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은 부적절하고 주제넘은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작동되고있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f. 'live cinema'(cinema direct)라고 불리는 영화 종류, 그룹 (하나의 큰 그룹이나 두개의 그룹들).이들은 정치적 이벤트나 반성으로부터 나왔는데, 그들과 비정치적인 영화와의 명확한 구분이 없다.왜냐하면 그들은 영화의 전통적인 이데올로기적으로 조작된 재현의 방식에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광부들의 투쟁은 Les Grandes Familles의 스타일과 같이 찍을 것이다.이런 영화들의 감독들은 마치 그들이 내러티브 전통의 이데올로기적인 필터를 제거해버리면현실자체가 진실된 형식으로 굴복할 것이라는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환상들에 사로 잡혀 있다. ( 공적인 아름다움에 강조점을 둔, 중심 생각으로 구성된 지배적인 생각들, 연출기법이나 건축양식)사실 그렇게 함으로써, 오직 하나의 필터는 제거 할 수 있지만, 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안된다.현실은 그 안에 이론과 진실의 자기 인식의 숨겨진 핵을 마치 과일 속에 들어있는 돌과 같이 가지고있다. (마르크스주의는 '현실'과 '인지된'사물간의 구별에서 이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Leacock의 Chief와 the May films의 a good number를 비교해 보라.이것은 왜 시네마 디렉트의 옹호자들이 그의 역할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리고 마치 다른 사람들이 위해 기술의생산품에 대해서 사용하듯이 그것의 성공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똑같은 이상주의적인 용어들을 사용하가의 이유이다. : '정밀함', '삶의 경험에 대한 느낌', '강한 진실의 섬광','생생한 순간들''우리가 영화를 보고 있는 느낌의 폐기'그리고 마지막으로: 환상.이것은 '보는 것이 이해하는 것이다'라는 마술적인 개념이다: 이데올로기는 그자체가 진실로 무엇인지가 드러나지 않기 위해서 , 자신을 비난하지 않게 단순히 응시하게끔 펼쳐 보여준다.g. 'live cinema'의 다른 종류. 여기 '외면을 통해 보는 것'이 카메라라는 생각에 만족하지 않는감독이 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영화속의 구체적인 물건들에 능동적인 역할을 부여함으로서 기본적인 묘사의 문제를 문제를 공격한다. 그럼으로써 이것은 생산적인 의미가 되고, (이데올로기)외부에서 생산되는 의미의 수동적인 저장소가 아니게 된다. :
[[[[[[Le Regne du Jour, La Rentree des Usines Wonder ]]]]
비평적 기능
그러면, 우리의 비병적인 작업의 분야:이데올로기안에서 이런 영화들, 그리고 그들의 그것과의 다른 관계들. 여기서부터 정확하게 정의된분야가 네가지 기능으로 나온다:1. 범주 a의 경우: 그들의 맹목적인 분야를 드러내라; 어떻게 그들이 이데올로기에 의해 완전히결정되었고, 틀이 잡혔는지에 대해서;2. 범주 b,c 그리고 g의 경우 두가지의 단계로 읽고, 기표와 기의의 단계에서 어떻게 중심적으로기능을 하고 있는지 드러내라.3. 범주 d와 f의 경우 기표에 대한 기술적이고 이론적인 작업이 부재되었을 경우 기의(정치적인 주제들)가 항상 약화되고, 무해하게 되는지를 보여라.4. 그룹 e의 경우 영화와 영화가 작동하는 방식에 의한 이데올로기에 의해 생성되는 간극을 지적하고, 그것들의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라.
(논평, 해설, 해독) 고찰을 위한 , (영화 칼럼류와 같은) [[[[방대한 [[[[[]]]]]]
이든지 비평적인 수행을 하기 위한 여유는 없다. 그것은 영화제작을 주관하는 엄격한 사실분석일 것이다. 손에 잡힐 듯한 또하나의 요소인, (경제적 상황, 이데올로기, 요구 그리고 반응) 그리고 그 속에 나타나는 의미들과 형태들에 대한 분석이다.변덕스럽과 곧 사라질 영화에 대한 글쓰기의 전통은 그것이 많은 것 뿐만 아니라 끈질기기까지 하다.그리고 오즐날의 영화분석은 아직도 대부분 이상주의적 전제들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다.이들은 오늘날 더 나아가 떠돌아 다니는데, 그러나 아직도 기본적으로 이 방식은 경험주의적이다. 이것은 영화의 기표적인 구조, 이것의 형식적인 조직이라는 물질적인 요소들로 돌아가는 기초적인 단계를 통해왔다. 이것의 첫번째 단계는 자신의 글에서 그에 대해 반대되는 글들이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부정할 수 없이 앙드레 바쟁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구조주의적언어학을 기본으로하는 접근방식을 따른다.(거기에는 우리가 빠지는 두가지 기본적인 덫이 있는데,그중 하나가 현상학적인 실증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기계적인 유물론이다.) 비평이 이 단계를넘어서게 되면, 그 다음 단계로 가야된다. 우리에게는 진보의 유일한 가능한 선은 20년대 러시아감독들의 이론적 저작들을 이용하는 것이다.(그중에소도 아이젠슈타인 ) 영화의 비평적 이론, 즉, 을 적용하고 정교화하기 위해서
Cahiers du Cinema에서 우리는 우리의 입장과 목표에 대한 전세계적인 분석을 실시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완전 무의 상태에서부터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분석의 조각들이 우연인 듯, 막연한 상태의 최근 우리가 출판했던 것들 (기사, 논설,토론, 독자에 대한 회답, 편지) 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것은 우리의 독자들도 우리 못지 않게 둘로 나눌수 없는 비판적 실천과 그것의 장을 연결시키는명료한 이론적 토대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프로그램화와 혁명적인 계획들 그리고 선언들은 그 자체들로서 종국을 맞기가 쉬기에 우리가 피하려고 하는 함정이다. 우리의 목표는 우리가 하고 하고자 하는 것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고 있는것,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드러내는 것인데, 이것은 현재상황에 대한분석없이는 불가능한 것들이다.
어디에?a.첫번째로 우리가 처해있는 장소이다. Cahiers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우리가 같이 하는 일의 결과중 하나는 잡지를 통해서 보여진다. 잡지라는 특정한생산물은 누군가 그것을 쓰고, 누군가 그것을 출판해 내고, 그리고 누군가는 그것을 읽게되는 특정한 양의 노동과 관련이 되게 된다. 우리는 이런 상품의 본성이 자본주의 출판계의 경제 시스템(출판 양식, 발행부수의 범위 등등)속에서 공명정대하게 위치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여하튼, 시스템에 평행하는 유토피아적인 사고들로 길을 읽지 않았다면, 오늘날 다른 방식을 가정하기는 힘들것이다. 후자의 접근에 있어서 첫번째 단계는시스템을 무효화시킬수 있는 호의적인 믿음에서, 도피하고자 시도하는 것으로부터 같이 있는 새로운 시스템은 언제나 거짓 전선이다. 사실 이것이 할 수 있는 전부는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사실 할 수 있는 전부는 거부하는 것이다. (이상주의자의 순수주의)와 결정적으로 머지않아 그 자체로 모델화되는적들에 의해 위험에 처해지게 되는 것이다. 이 평행주의는 오직 한방향으로만 작동된다.우리는 양방향으로 작동해야된다고 믿는 반면, 이것은 상처입은자의 한 방향만을 건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무한대에서의 고속의 평행선의 만남의 위험성은우리에게 차라리 유한대에서 서로가 평인상태로를 인정하면서 유지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주장하는 듯 하다.이렇게 가정되었을때,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의 상황에서 우리의 태도는 무엇인가?프랑스에서 영화의 대부분은 , 대부분의 책이나 잡지에서 처럼,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안에서자본주의 경제구조에 의해서 생산되고, 분배된다. 사실, 엄격히 말해서, 아무리 진취적인 것을 채택해서 시도한다고 해도, 우리는 다 이렇다. 이런 상태이므로, 우리가 물어야 하는 질문은 이것이다: 어떤 영화, 책, 그리고 잡지가 자유롭게, 방해받지 않는 문장을 쓴 이데올로기를 허용하며, 투명하게 전달하고, 선택된 언어로서 작용할 수 있을까?그리고 어떠한 시도가 그것을 다시 되돌리고, 반성하고, 그것들을 막아냄으로서, 그 메카니즘을 '폭로해서 분명히 눈에 보이도록 할 수 있을까?b.우리가 연기하고 있는 장소는 영화의 장이다. (Cahiers는 영화잡지), 그리고우리 연구의 분명한 목적은 영화의 역사이다.그것이 어떻게 기획되고, 제조되며,배분되고, 이해되는가 말이다.오늘날의 영화는 무엇인가? 이것은 적절한 질문의다; 아니다. 전에 그랬을 법하게도: 영화는 과연 시네마는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이론과 지식의 실체가 현재의 공허한 개념과 말들을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해 진화해나갈때 까지 이론의 실체, 지식의 실체에대해서 질문을 던질 수 없을 것이다.영화잡지로서 질문은 역시 이것이다: 어떤 일들이 영화로 구성된 범위들에서 행해져야 하는가?그리고 특히 Cahiers로서는: 이 부분에서 우리의 특별히 해야하는 기능은 무엇인가?우리를 달느 잡지와 구별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영화들.영화는 무엇인가? 한편으로는 이것은 특별한 상품인데, 주어진 경제관계 시스템속에서, 자본주의자에게는 돈으로 이해되는 생산하기 위한 노동과 연관지어서 제조되고 있다. 이런 상황은 독립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던가, 'new cinema'를 지향하는 사람들 조차 똑같은 목적을 위해특정한 수의 노동자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이것은 감독에게조차 , 그가 Moullet던지 Oury던지 상관없이 영화노동자 분석의 마지막 단계로 적용된다.) 이것은 시장의 법칙에 의해 좌우되는 매표 수입이나, 계약 등의교환가치를 지니고 있는 상품으로 변형이 된다. 다른한편, 이런 시스템속의 물질적 상품화의결과로서, 이것은 또한 시스템상의 이데올로기적이 상품화가 되는 것이다. 프랑스의 경우그것은 자본주의를 뜻하는 것이다.
어떤 영화관계자라도, 단지 자신의 개인적인 노력으로, 그의 영화의 생산과 분배를 관장하는 경제관계를 바꿀 수 있을 수는 없다. (내용과 형식상으로 혁명적인 영화로서 출발한 영화감독이랄지라도 경제구조상의 순식간의 변화나 급진적인 변혁을 가져올 수는 없다는 것은 여러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물론 훼손시키거나, 편향시킬지는 몰라도 그것을 무효화시거나, 그것의 구조자체를 심각하게전복시킬 수는 없다. 고다르가 최근 자신은 이러한 구조속에서 일하기를 그만두고 싶다고 언급한 것은 그 어떤 조직도 그가 피하기를 원했던 것들의 투영이라는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자금은 더이상 프랑스에서 조달되지 않는다고 해도 영국, 이태리, 미국등이 그것을 맡게 된다. 영화가 더이상 독점적인 배급에의해 시장에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또다른독점인 코닥의 필름으로 영화를 찍는 것이다. ) 왜냐하면 모든 영화는 경제시스템의 일부분일 수 밖에 없고, 영화와 예술이 이데올로기 상의 하나의 가지들이기에, 이데올로기의 시스템안의 일부분일 수 밖에 없다. 어느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고, 마치 퍼즐조각들처럼 어디선가할당된 일부분의 몫이 있는 것이다. 이 시스템은 그 본질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아니 사실은 그러한 이유때문에 이 모든 조각들이 다 맞춰졌을때는 그림이 확실하게드러나는 것이다. 그러한 모든 영화감독들이 다 똑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반응들은각기 다르다. 아무리 그들을 조건짓고 있는 이데올로기 자체를 바꾼다고 슬로건들을 내세운 속에서 그 어떤 마술적인 변혁을 기대하지 않으면서 천천히,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것이 바로 비평의 해야 할 일인 것이다. 내가 나중에 다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몇가지를 집고 넘어가자면: 모든 영화는 정치적이고, 그것을 생산해내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결정이 된다. (아니면, 그곳에서이데기올로기가 생성되든지, 그 줄기는 같은 것이다.) 영화는 더더욱 철저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결정되어있는데, 왜냐하면 다른 예술들이나 이데올로기 시스템과는 달리 문학을 출판하듯이이것은 강력한 경제영향력을 결집시키기 때문이다. (책이라는 상품이 되기까지 유통과, 광고, 그리고 판매의 단계에 이르기까지 이 둘은 같은 역할을 한다.)확실히, 영화는 현실을 복제하고 잇다.: 이것은 카메라와 필름 뭉치가 이데올고기를 위한 것이라는점이다. 그러나 영화만들기에 있어, 도구들과 기술들은 그자체의 현실의 일부분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현실이란 지배 이데올로기의 표현에 불과하지 않다. 이렇게 볼때, 전통적인 영화이론들, 즉, 카메라는 세상이라는 구체적인 현실의 세계를 이해하고, 혹은 거기에 스며들게 하는 공명정대한기구라는 견해는 상당히 반동적인 것이다. 사실 카메라가 잡아내는 것은 막연하고,공식화되지 않고,이론화되지 않고, 생각이 없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세계인 것이다. 카메라는 세상이 그자체와 소통하는 하나의 언어인 셈이다. 그들은 그것들의 이데올로기를 구성해내는데, 이데올로기에 의해 걸러진 후에 그것이 경험되는 세상 그대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좀더 자세히 알튀세르가 정의하듯이, 이데올로기란 지각되고,받아들여지고, 문화적인 대상들로인해 고통을 겪게된다. 이런과정은 근본적으로 인간에게 영향을 끼치지만, 그들은 이과정을 깨닫지 못한다. 인간이 이데올로기속에서 표현하는 것은 그들존재에 대한 진실된 관계성이 아니라, 어떻게 존재의 조건에 대해서 반응하느냐인 것이다; 그것이진정한 관계와 상상속의 관계에 대한 전제 조건인 셈이다.) 그래서, 우리가 영화를 만든다고 할때, 그 첫번째 샷에서부터 우리는 사물들을 재현해재는 요구에 의해 방해를 받게 되는데, 그것은그 존재 자체로서의 재현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에 의해 굴절된 상으로의 재현을 말하게 된다.이것은 제작의 모든 단계에서 나타난다: 주제, '스타일', 형식, 의미, 스토리전개 전통; 모든것이 일반적인 이데올로기 담론을 강화하고 있다. 영화는 그자체에서 자체로 드러나고, 말하고,그 자체에 대해 배우는 이데올로기이다. 우리가 일단 영화를 이데올로기의 도구로서 전화시키는시스템의 본질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영화감독의 제일 임무가 영화의 소위 말하는, 현실의 재현이라는 것을 드러내 보이고, 그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가 영화와 이데올로기 기능간의 관계를 분열시키고, 가능하면 절단시킬수 있는 기회가 일을 것이다. 오늘날 가장 중요한 영화의기능은 그들이 이것을 하느냐, 아니면 하지 않느냐에 있는 것이다.a. 첫번째이면서도 가장 거대한 범주는 철저하게 지배 이데올로기에 물들어 있는데 그 방식이 너무도 깨끗하고 순수한 형태여서, 영화 제작자들 조차도 그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영화들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단순히 소위 '상업'영화만을일컫지 않는다. 모든 범주에 있어서 대부분의 영화들이 그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자각하지 않지만 도구이다. 그 영화가 상업적이든, 야심작이든, 현대적이든, 전통적이든, 예술극장에서 상영되든, 작은 영화관이든, 고전영화에 속하든지, 젊은 영화에 속하든지, 거의대부분이 다 똑같은 이데올로기를 비벼놓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모든 영화가 상품이고 그래서 교환의 대상이며, 그들의 담론이 숨김없이 정치적이다, 그래서 정치적 영화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은 정의상 정치적인 영화를구성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와 영화의 합병은 관객과 경제적인 반응이 한가지로 그것도 같은 것으로 귀결된다는점에서 반영된다. 직접적인 정치적 실습과의 연속성에서, 이데올로기 실습은 담론으로 강화되는사회적 요구를 재정비하게 된다. 이것은 가설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확립된 사실이다. 이데올로기는 그자체에게 말을 한다;이것은 질문을 하기도 전에 이미 모든 해답을 가지고 있다. 확실이 대중의 요구와 같은 것들이 있긴 하지만, 그러나 대중이 원하는 것'이라는 것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원한는 것이란의미인 것이다. 대중과, 대중이 워하는 것이란 개념은 이데올로기가 그것을 합리화하고 그것을영속시키기 위해 창조해낸 것이다. 그리고 대중은 오직 이데올로기의 양식화된 사고를 통해서만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폐쇄회로로, 끊임없이 똑같은 환상을 반복해 내고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예술적 형태의 단계에서도 똑같다. 이 영화는 완전히 현실을 묘사하는확립된 체계만을 받아들인다: '브르조아 사실주의' 그리고 보수적인 계략들의 합: 생명, 인간성, 상식 등의 맹목적인 믿음들, 축복받은 무식함 즉, 모든 단계의 생산의 단계에서 나타나는 묘사의 개념이 어딘가 잘못되었것이라는 그래서, 우리한테는 매표소의 판매수익보단느 상업적이라는개념이 더욱더 영화에 있어서 측정기준이 되는 것이다. 어떤 영화도 이데올로기에 반해서, 혹은 관객의 신비화에 반해서 삐걱거릴수 없다. 관객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일상생활의 이데올로기와영화 스크린 상에 나타난 이데올로기와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참으로 안심이되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영화 평론가에게는 이데올로기 시스템과 그것의 상품이 하나로 통합되는 것을 보는 것은 상호 보완적으로 유용한 것이다. 어찌하여 영화가 관객에게 독백이되는지, 예를 들어 Melville, Oury, Lelouch와 같은 감독의 성공적인 영화를 살펴보더라도이데올로기가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것을 공부하는 것은 중요하다.b. 두번째 담론은 그 자신의 이데올로기 동화를 두가지 측면에서 공격하는 영화들이다.첫번째로 직접적인 정치적 행동에 의해, '기의'의 단계에서 , 그들은 직젖ㅂ적으로 정치적인 주제들을 다룬다. '다룬다'라는 말은 여기에서 능동의 의미이다.: 그들은 단순히 이슈를 토론하고, 반복하고,부연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를 공격하기 위해 사용한다.(이것은 이데올로기적인 행동의 정반대인 이론적인 행동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러한 행동은이것이 전통적인 현실의 재현방식을 파괴하는 것과 연관있을 경우에만 정치적으로 효과가있게 된다. 형식의 단계에서는, 화해되지 않고, The Edge and Eath in Revolt, 묘사에 대한 개념에 대한 저항과 그것을 구체화하는 전통에 대한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다.우리는 오직 양측의 행동, 즉 '기표'와 '기의'만이 만연해 있는 이데올로기에 저항해서 작동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경제/정치적이고 공식적인 행동이결합되어야 한다.
[[[[[c.똑같은 이중작동의, 그러나 거슬려서 작동하는 또하나의 담론이 있다. 그 내용은 명백하게 정치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 형태를 거쳐서 비판을 거쳐서 작동되기에 몇몇은 꽤 철저하게작동되고 있다. 이 범주에 Mediterranee, the Belboy, Persona..등이 속해 있는 것이다.]]]
[[[[Cahiers에게는 영화 (b와c)는 시네마에게는 필수적이고 잡지의 주요 주제가 되어야 한다.]]
d.네번째의 경우: 이 형화들은, 요즘들어서 많이 들어나고 있는, 명백하게 정치적인 내용을포함하고 있다.(z는 마치 청치학의 재현이 처음부터 끝까지 끊임없이 이데올로기적인것처럼 최고의 예가 아니다; 좀 더 나은 예가 Le Temps de Vivre가 될 것이다.)그러나 효과적으로 그 자신이 속해 있는 이데올로기 시스템ㅇ르 비판하고 있지 못한다. 왜냐한면 물을 필요도 없이그것의 언어와 이미지가 그 이데올로기 속에 깊숙히 박혀 있기 때문이다.이것이 비평가에게 이런 영화들에게서 의도된 정치적 비판의 효과성ㅇ르 검증하는 것이중요한 일이 되게 하였다. 그들이 자신들이 비난하려고 했던 것들을 오히려 표현하고, 보충하고, 강화하였는가? (a를 보라)e.다섯번째: 처음에 보기에는 확실이 이데올로기 안에 속해 있는 것 같고 그 통치안에있는 것 같은 영화가, 그러나 단지 애매한 방식으로 그랬던 것이 밝여지는 영화가 있다. 이것들은 처음에는 온건하게 비판하는 회유적인 솔직한 반동인, 혁신적이지 않은 관점에서 출발했지만 계속 꾸준히 작업을 해서 , 시작점과 끝지점 사이에 엄청난 전위와 눈에 띨 정도의간극이 있는 것들이다. 우리는 일관되지 않고, 중요하지 않은, 감독이 지배 이데올로기를 의식적으로 사용하고, 그러나 절대적으로 직설적으로 말하는 영화는 무시한다. 우리가 말하는 영화는 그것에 봉사하고 코스를 이탈하게 하는 이데올로기에 반해서 방해물을 던져버리는 것이다. 영화적인 틀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보게 하지만 , 또한 그것을 보여줌으로서 규탄하는 것이다. 두가지의 순간들이 들어있는 틀을 살펴보자:하나는 어느정도의 제한안에서 하나는 그것을 지니고 있고, 또하나는 그것을 거스르는 것이다.내적 비판은 솔기부분에서 영화가 갈라짐이 일어난다. 어떤 사람이 어떤 증상들을 찾으며,영화를 삐딱하게 본다면 그 사람은 이것이 갈라진 틈 투성이 인것을 볼 것이다: 이데기올로기적으로아무 해가 없는 영화속에서 있지도 않은 내적 긴장감으로 분리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데올로기는 이 테스트에 점점 종속되는 것이다. 더이상 존재에 독립적이지 못한다: 그것은영화에 의해 재현이 된다. 이것은 바로 많은 헐리웃 영화들의 상황이다. 예를 들어 시스템과이데올로기가 완벽하게 통합되었지만 결국 부분적으로 속에서부터 시스템이 와해되는 것이다. 우리는 영화감독들이 그의 영화의 언어로서 다시 재현함으로서 이데올로기를 부식시킬 수 있는방섭을 찾아야만 한다: 그가 단순히 그의 영화를 자유주의 편향ㄷ뇌 한방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이데올로기의 의해 즉시 만회하고 말것이다; 그 반면에, 그가 그것을 이미지의 더 깊은 단계까지생각하고 깨닫는다면 그것은 더욱 파괴적인 힘이 될 가능성이 있다. 물론 그가 이데올로기 자체를깨뜨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단순히 그의 영화속에서 반영할 수는 있다. (Ford, Dreyer, Rosselini의 영화와 같은 예에서 처럼.) 영화의 범주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우리는 절대적으로 작금의 마녀사냥에 동조하고 싶은 의도는 없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름의 믿음에 대한 신화를가지고 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비판하고, 물론 그런 것이 글로써 쓰여질 의도는 없지만, 그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은 부적절하고 주제넘은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작동되고있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f. 'live cinema'(cinema direct)라고 불리는 영화 종류, 그룹 (하나의 큰 그룹이나 두개의 그룹들).이들은 정치적 이벤트나 반성으로부터 나왔는데, 그들과 비정치적인 영화와의 명확한 구분이 없다.왜냐하면 그들은 영화의 전통적인 이데올로기적으로 조작된 재현의 방식에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광부들의 투쟁은 Les Grandes Familles의 스타일과 같이 찍을 것이다.이런 영화들의 감독들은 마치 그들이 내러티브 전통의 이데올로기적인 필터를 제거해버리면현실자체가 진실된 형식으로 굴복할 것이라는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환상들에 사로 잡혀 있다. ( 공적인 아름다움에 강조점을 둔, 중심 생각으로 구성된 지배적인 생각들, 연출기법이나 건축양식)사실 그렇게 함으로써, 오직 하나의 필터는 제거 할 수 있지만, 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안된다.현실은 그 안에 이론과 진실의 자기 인식의 숨겨진 핵을 마치 과일 속에 들어있는 돌과 같이 가지고있다. (마르크스주의는 '현실'과 '인지된'사물간의 구별에서 이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Leacock의 Chief와 the May films의 a good number를 비교해 보라.이것은 왜 시네마 디렉트의 옹호자들이 그의 역할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리고 마치 다른 사람들이 위해 기술의생산품에 대해서 사용하듯이 그것의 성공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똑같은 이상주의적인 용어들을 사용하가의 이유이다. : '정밀함', '삶의 경험에 대한 느낌', '강한 진실의 섬광','생생한 순간들''우리가 영화를 보고 있는 느낌의 폐기'그리고 마지막으로: 환상.이것은 '보는 것이 이해하는 것이다'라는 마술적인 개념이다: 이데올로기는 그자체가 진실로 무엇인지가 드러나지 않기 위해서 , 자신을 비난하지 않게 단순히 응시하게끔 펼쳐 보여준다.g. 'live cinema'의 다른 종류. 여기 '외면을 통해 보는 것'이 카메라라는 생각에 만족하지 않는감독이 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영화속의 구체적인 물건들에 능동적인 역할을 부여함으로서 기본적인 묘사의 문제를 문제를 공격한다. 그럼으로써 이것은 생산적인 의미가 되고, (이데올로기)외부에서 생산되는 의미의 수동적인 저장소가 아니게 된다. :
[[[[[[Le Regne du Jour, La Rentree des Usines Wonder ]]]]
비평적 기능
그러면, 우리의 비병적인 작업의 분야:이데올로기안에서 이런 영화들, 그리고 그들의 그것과의 다른 관계들. 여기서부터 정확하게 정의된분야가 네가지 기능으로 나온다:1. 범주 a의 경우: 그들의 맹목적인 분야를 드러내라; 어떻게 그들이 이데올로기에 의해 완전히결정되었고, 틀이 잡혔는지에 대해서;2. 범주 b,c 그리고 g의 경우 두가지의 단계로 읽고, 기표와 기의의 단계에서 어떻게 중심적으로기능을 하고 있는지 드러내라.3. 범주 d와 f의 경우 기표에 대한 기술적이고 이론적인 작업이 부재되었을 경우 기의(정치적인 주제들)가 항상 약화되고, 무해하게 되는지를 보여라.4. 그룹 e의 경우 영화와 영화가 작동하는 방식에 의한 이데올로기에 의해 생성되는 간극을 지적하고, 그것들의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라.
(논평, 해설, 해독) 고찰을 위한 , (영화 칼럼류와 같은) [[[[방대한 [[[[[]]]]]]
이든지 비평적인 수행을 하기 위한 여유는 없다. 그것은 영화제작을 주관하는 엄격한 사실분석일 것이다. 손에 잡힐 듯한 또하나의 요소인, (경제적 상황, 이데올로기, 요구 그리고 반응) 그리고 그 속에 나타나는 의미들과 형태들에 대한 분석이다.변덕스럽과 곧 사라질 영화에 대한 글쓰기의 전통은 그것이 많은 것 뿐만 아니라 끈질기기까지 하다.그리고 오즐날의 영화분석은 아직도 대부분 이상주의적 전제들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다.이들은 오늘날 더 나아가 떠돌아 다니는데, 그러나 아직도 기본적으로 이 방식은 경험주의적이다. 이것은 영화의 기표적인 구조, 이것의 형식적인 조직이라는 물질적인 요소들로 돌아가는 기초적인 단계를 통해왔다. 이것의 첫번째 단계는 자신의 글에서 그에 대해 반대되는 글들이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부정할 수 없이 앙드레 바쟁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구조주의적언어학을 기본으로하는 접근방식을 따른다.(거기에는 우리가 빠지는 두가지 기본적인 덫이 있는데,그중 하나가 현상학적인 실증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기계적인 유물론이다.) 비평이 이 단계를넘어서게 되면, 그 다음 단계로 가야된다. 우리에게는 진보의 유일한 가능한 선은 20년대 러시아감독들의 이론적 저작들을 이용하는 것이다.(그중에소도 아이젠슈타인 ) 영화의 비평적 이론, 즉, 을 적용하고 정교화하기 위해서
2009년 6월 7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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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LUC COMOLLI AND JEAN NARBONI/
CINEMA/IDEOLOGY/CRITICISM
Scientific criticism has an obligation to define its field and methods. This implies awareness of its own historical and social situation, a rigorous analysis of the proposed field of study, the conditions which make the work necessary and those which make it possible, and the special function it intends to fulfill.
It is essential that we at Cashiers du Cinema should now undertake just such a global analysis of our position and aims. Not that we are starting entirely from zero. Fragments of such an analysis have been coming out of material we have published recently (articles, editorials, debates, answers to readers’ letters) but in an imprecise form and as if by accident. They are an indication that our readers, just as much as we ourselves, feel the need for a clear theoretical base to which to relate our critical practice and its field, taking the two to be indivisible. ‘Programmes’ and ‘revolutionary’ plans and declarations tend to become an end in themselves, this is a trap we intend to avoid. Our objective is not to feflct upon what we ‘want’ (would like)to do, but upon what we are doing and what we can do, and this is impossible without an analysis of the present situation
WHERE?
a. First, our situation. Cashiers is a group of people working together; one of the results of our work appearing as a magazine. A magazine, that is to say, a particular product, involving a particular amount of work (on the part of those who write it, those who produce it and, indeed, those who read it). We do not close our eyes to the fact that a product of this nature is situated fairly and squarely inside the economic system of capitalist publishing (modes of production, spheres of circulation, etc.). in any case it is difficult to see how it could be otherwise today, unless one is led astray by Utopian ideas of working ‘parallel’ to the system. The first step in the latter approach is always the paradoxical one is setting up a false front, a ‘neo-system’ alongside the system from which one is attempting to escape, in the fond belief that it will be able to negate the system. In fact all it can do is reject it. (idealist purism)and consequently it is very soon jeopardized by the enemy upon which it modeled itself. This ‘parallelism’ works from one direction only. It touches only one side of the wound, whereas we believe that both sides have to be worked upon. And the danger of the parallels meeting al too speedily in infinity seems to us sufficient to argue that we had better stay in the finite and allow them to remain apart.
This assumed, the question is: what is our attitude to our situation? In France the majority of films, like the majority of books and magazines, are produced and distributed by the capitalist economic system and within the dominant ideology. Indeed, strictly speaking all are, whatever expedient they adopt to try and get around it. This being so, the question we have to ask is: which films, books, and magazines allow the ideology a free, unhampered passage, transmit it with crystal clarity, serve as its chosen language? And which attempt to make it turn back and reflect itself, intercept it, make it visible by revealing its mechanisms, by blocking them?
b. For the situation in which we are acting is the field of cinema (Cahiers is a film magazine), and the precise object of our study is the history of a film: how it is produced, manufactured, distributed, understood.
What is the film today? This is the relevant question; not, as it possibly once was: what is the cinema? We shall e to ask that again until a body of knowledge, of theory, has been evolved (a process to which we certainly intent to contribute) to inform what is at present an empty term, with a concept. For a film magazine the questions also: what work is to be done in the field constituted by films? And for Cahiers in particular: what is our specific function in this field? What is to distinguish us from other ‘film magazins’?
THE FILMS
What is a film? On the one hand it is a particular product, manufactured within a given system of economic relations, and involving labour (which appears to the capitalist as money)to produce-a condition to which even ‘ndependent’ film-makers and the ‘new cinema’ are subject- assembling a certain number of workers for this purpose (even the director, whether he is Moullet or oury, is in the last analysis only a film worker). It becomes transformed into a commodity, possessing exchange value, which is realized by the sale of tichets and contracts, and governed by the laws of the market. On the other hand, as a result of being a material product of the system, it is also an ideological product of the syste, which in France means capitalism.
No filmmaker can, by his own individual efforts, change the economic relations governing the manufacture and distribution of his films. (it cannot be pointed out too often that even filmmakers who wet out to be ‘revolutionary’ on the level of message and form cannot effect any swift or radical change in the economic system- deform it, yes, deflect it, but not negate it or seriously upset it structure. Godard’s recent statement to the effect that he wants to stop working in the ‘system takes no account of the fact that any other system is bound to be a reflection of the one he wishes to avoid. The money no longer comes from the Champs-Elysees but from London, Rome, or New York. The film may not be marketed by the distribution monopolies but it is shot on film stock from another monopoly- Kodak.) because every film is part of the economic system it is also a part of the ideological system, for ‘cinema’ and ‘art’ are branches of ideology. None can escape, somewhere, like pieces in a jigsaw, all have their own allotted place. The system is blind to its own nature, but in spite of that, indeed because of that, when all the pieces are fitted together they give a very clear picture. But this does not mean that every filmmaker plays a similar role. Reactions differ.
It is the job of criticism to see where they differ, and slowly, patiently, not expecting any magical transformations to take place at the wave of a slogan, to help change the ideology which conditions them.
A few points, which we shall return to in greater detail later: every film is political, inasmuch as it is determined by the ideology which produces it (or within which it is produced, which stems from the same thing). The cinema is all the more thoroughly and completely determined because unlike other arts or ideological systems its very manufacture mobilizes powerful economic forces in a way that the production of literature (which becomes the commodity ‘books’, does not- though once we reach the level of distribution, publicity, and sale, the two are in rather the same position).
Clearly, the cinema ‘reproduces’ reality: this is what a camera and film stock are for- so says the ideology. But the tools and techniques of filmmaking are a part of reality’ themselves; and furthermore ‘reality’ is nothing but an expression of the prevailing ideology. Seen in this light, the classic theory of cinema that the camera is an impartial instrument which grasps, or rather is impregnated by, the world in its ‘concrete reality’ is an eminently reactionary one. What the camera in fact registers is the vague, unformulated, untheorized, unthought-out world of the dominant ideology. Cinema is one of the languages through which the world communicates itself to itself. They constitute its ideology for they reproduce the world as it is experienced when filtered through the ideology. (as Althusser defines it, more precisely: ‘ideologies are perceived-accepted-suffered cultural objects, which work fundamentally on men by a process they do not understand. What men express in their ideologies is not their true relation to their conditions of existence, but how they react to their conditions of existence; which presupposes a real relationship and an imaginary relationship.) so, when we set out to make a film, from the very first shot, we are encumbered by the necessity of reproducing things not as they really are but as they appear when refracted through the ideology. This includes every stage in the process of production: subjects, ‘styles’, forms, meaning, narrative tradition; all underline the general ideological discourse. The film is ideology presenting itself to itself, talking to itself, learning about itself. Once we realize that is the nature of the system to turn the cinema into an instrument of ideology, we can see that the filmmaker’s first task is to show up the cinema’s so-called depiction of reality’ if he can do so there is a chance that we will be able to disrupt or possibly even sever the connection between the cinema and its ideological function.
The vital distinction between films today is whether they do this or whether they do not.
a.The first and largest category comprises those films which are imbued through and through with the dominant ideology in pure and unadulterated form, and give no indication that their makers were even aware of the fact. We are not just talking about so –called ‘commercial’ films. The majority of films in all categories are the unconscious instruments of the ideology which produces them. Whether the film is ‘commercial’ or ‘ambitious’, ‘modern’ or ‘traditional’, whether it is the type that gets shown in art houses, or in smart cinemas, whether it belongs to the ‘old’ cinema or the ’young’ cinema, it is most likely to be a re-hash of the same old ideology. For all films are commodities and therefore objects of trade, even those whose discourse is explicitly political- which is why a rigorous definition of what constitutes ‘political’ cinema is called for at this moment when it is being idely promoted. This merging of ideology and film is reflected in the first instance by the fact that audience demand and economic response have also been reduced to one and the same thing. In direct continuity with political practice, ideological practice reformulates the social need the backs it up with a discourse. This is not a hypothesis, but a scientifically established fact. The ideology is talking to itself; it has all the answers ready before it asks the questions. Certainly there is such a thing as public demand, but ‘what the public wants’ means’ what the dominant ideology wants’. The notion of a public and its tastes was created by the ideology to justify and perpetuate itself. And this public can only express itself via the thought-patterns of the ideology. The whole thing is a closed circuit, endlessly repeating the same illusion.
The situation is the same at the level of artistic form. These films totally accept the established system of depicting reality: ‘bourgeois realism’ and the whole conservative box of tricks: blind faith in ‘life’, ‘humanism’, ‘common sense’, etc. a blissful ignorance that there might be something wrong with this whole concept of ‘depiction’ appears to have reigned at every stage in their production, so much so, that to us it appears a more accurate gauge of pictures in the ‘commercial’ category than box-office returns. Nothing in these films jars against the ideology or the audience’s mystification by it. They are very reassuring for audiences for there is no difference between the ideology they meet every day and the ideology on the screen. It would be a useful complementary task for film critics to look into the way the ideological system and its products merge at all levels: to study the phenomenon whereby a film being shown to an audience becomes a monologue, in which the ideology talks to itself, by examining the success of films by, for instance, Melville, Oury, and Lelouch.
b. A second category is that of films which attack their ideological assimilation on two fronts. Firstly, by direct political action, on the level of the ‘signified’, that is they deal with a directly political subject. ‘deal with’ is here intended in an active sense: they do not just discuss an issue, reiterate it, paraphrase it, but use it to attack the ideology ( this presupposes a theoretical activity which is the direct opposite of the ideological one). This act only becomes politically effective if it is linked with a breaking down of the traditional way of depicting reality. On the level of form, Unreconciled, The Edge and Earth in Revolt all challenge the concept of ‘depiction’ and mark a break with the tradition embodying it.
We would stress that only action on both fronts, ‘signified’ and ‘signifiers’ has any hope of operating against the prevailing ideology. Economic/political and formal action have to be indissolubly wedded.
c. There is another category in which the same double action operates, but ‘against the grain’. The content is not explicitly political, but n some was becomes so through the criticism practiced on it through its form. To this category belong Mediterranee, the Belboy, Persona… For Cahiers these films (b and c) constitute the essential in the cinema, and should be the chief subject of the magazine.
d. Fourth case: those films, increasingly numerous today, which have an explicitly political content (Z is not the best example as its presentation of politics is unremittingly ideological from first to last; a better example would be Le Temps de Vivre) but which do not effectively criticize the ideological system in which they are embedded because they unquestioningly adopt its language and its imagery.
This makes it important for critics to examine the effectiveness of the political criticism intended by these films. Do they express, reinforce, strengthen the very thing they set out to denounce? Are they caught in the system they wish to break down…? (see a)
e. Five: films which seem at first sight to belong firmly within the ideology and to be completely under is sway, but which turn out to be so only in an ambiguous manner. For though they start from a nonprogressive standpoint, ranging from the frankly reactionary through the conciliatory to the mildly critical, they have been worked upon, and work, in such a real way that there is noticeable gap, a dislocation, between the starting point and the finished product. We disregard here the inconsistent-and unimportant- sector of films in which the director makes a conscious use of the prevailing ideology, but leaves it absolutely straight. The film we are talking about throw up obstacles in the way of the ideology, causing it to serve and get off course. The cinematic framework lets us see it, but also shows it up and denounces it. Looking at the framework one can see two moments in it: one holding it back within certain limits, one transgressing them. A internal criticism is taking place which cracks the film apart at the seam. If on e reads the film obliquely, looking for symptoms; if one looks beyond its apparent formal coherence, one can see that it is riddled with cracks: it is splitting under an internal tension which is simply not there in an ideologically innocuous film. The ideology thus becomes subordinate to the test. It no longer has an independent existence: it is presented by the film. This is the case in many Hollywood films, for example, which while being completely integrated in the system and ideology end up by partially dismantling the system from within. We must find out what makes it possible for a filmmaker to corrode the ideology by restating it in the terms of his film: if he sees his film simply as a blow in favor of liberalism , it will be recuperated instantly by the ideology; if on the other hand, he conceives and realizes it on the deeper level of imagery, there is a chance that it will turn out to be more disruptive. Not, of course, that he will be able to break the ideology itself, but simply its reflection in his film. (the films of Ford, dreyer, Rosselini, for example.)
our position with regard to this category of films is : that we have absolutely no intention of joining the current witch-hunt against them. They are the mythology of their own myths. They criticize themselves, even f no such intention is sritten into the scrip, and it is irrelevant and impertinent to do so for them. All we want to do is to show the process in action.
f. Films of the ‘live cinema’ (cinema direct) variety, group one (the larger of the two groups). These are films arising out of political (or, it would probably be more exact to say: social)events or reflections, but which make no clear differentiation between themselves and the nonpolitical cinema because they do not challenge the cinema’s traditional, ideologically conditioned method of ‘depiction’. For instance a miner’s strike will be filmed in the same style as Les Grandes Famlles. The makers of these films suffer under the primary and fundamental illusion that if they once break off the ideological filter of narrative traditions (dramaturgy, construction, domination of the component parts by a central idea, emphasis on forma beauty) reality will then yield itself up in its true form. The fact it that by doing so they only break off one filter, and no the most important one at that. For reality holds within itself no hidden kernel of self-understanding, of theory, of truth, like a stone inside a fruit. We have to manufacture those. (Marxism is very clear on this point, in its distinction between ‘real’ and ‘perceived’ objects.) compare Chiefs (Leacock) and a good number of the May films.
This is why supporters of cinema direct resort to the same idealist terminology to express its role and justify its successes as others use about products of the greatest artifice: ‘accuracy’, ‘a sense of lived experience’, ‘flashes of intense truth’, ‘moments caught live’, ‘ abolition of all sense that we are watching a film’ and finally: fascination. It is that magical notion of ‘seeing is understanding’: ideology goes on display to prevent itself from being shown up for what it really is, contemplates itself but does not criticize itself.
g. The other kind of ‘live cinema’. Here the director is not satisfied with the idea of the camera ‘seeing through appearances’, but attacks the basic problem of depiction by giving an active role to the concrete stuff of his film. It then becomes productive of meaning and is not just a passive receptacle for meaning produced outside it (in the ideoloty): L Regne du Jour, La Rentree des Usines Wonder.
CRITICAL FUNCTION
Such, then, s the field fo our critical activity: these films, within the ideology, and their different relations to it. From this precisely defined field spring four functions:1.in the case of the films in category a: show what they are blind to; how they are totally determined, moulded, by the ideology; 2.in the case of those in categories b,c and g, read them on two levels, showing how the films operate critically on the level of signified and signifiers; 3. In the case of those of types d.and f. show how the signified (political subject matter) is always weakened, rendered harmless, by the absence of technical/theoretical work on the signifier; 4. In the case of those in group e. point out the gap produced between film and ideology by the way the films work, and show how they work.
There can be no room in our critical practice either for speculation (commentary, interpretation, de-coding even) or for specious raving (of the film-columnist variety.) it must be a rigidly factual analysis of what governs the production of a film (economic circumstances, ideology, demand, and response) and the meanings and forms appearing in it, which are equally tangible.
The tradition of frivolous and evanescent writing on the cinema is as tenacious as it is prolific, and film analysis today is still massively predetermined by idealistic presuppositions. It wanders farther abroad today, but its method is still basically empirical. It has been through a necessary stage of going back to the material elements of a film, its signifying structure, its formal organization. The first steps here were undeniably taken by Andre Bazin, despite the contradictions that can be picked out in his articles. Then followed the approach based on structural linguistics (in which there are two basic traps, which we fell into- phenomenological positivism and mechanistic materialism). As surely as criticism had to go through this stage, it has to go beyond. To us, the only possible line of advance seems to be the use the theoretical writing of the Russian filmmakers of the twenties (Eisnstein above all) to elaborate and apply a critical theory of the cinema, a specific method of apprehending rigorously defined objects, in direct reference to the method of dialectical materialism.
It is hardly necessary to point out that we know that the ‘policy’ of a magazine cannot- indeed, should not-be corrected by magic overnight. We have to do it patiently, month by month, being careful in our own field to avoid the general error of putting faith in spontaneous change, or attempting to rush into a ‘revolution’ without the preparation to support it. To start proclaiming at this stage that the truth has been revealed to us would be like talking about ‘miracles’ or ‘conversion’. All we should do is to state what work is already in progress and publish articles which relate to it, either explicitly or implicitly.
We should indicate briefly how the various elements in the magazine fit into this perspective. The essential part of the work obviously takes place in the theoretical articles and the criticism. There is coming to be less and less of a difference between the two, because it is not our concern to add up the merits and defects of current films in the interests of topicality, nor, as on humorous article put it ‘to crack up the product’. The interviews, on the other hand, and also the ‘diary’ column and the list of films, with the dossiers and supplementary material for possible discussion later, are often stronger on information than theory. It is up to the reader to decide whether these pieces take up any critical stance, and if so what.
1969.
CINEMA/IDEOLOGY/CRITICISM
Scientific criticism has an obligation to define its field and methods. This implies awareness of its own historical and social situation, a rigorous analysis of the proposed field of study, the conditions which make the work necessary and those which make it possible, and the special function it intends to fulfill.
It is essential that we at Cashiers du Cinema should now undertake just such a global analysis of our position and aims. Not that we are starting entirely from zero. Fragments of such an analysis have been coming out of material we have published recently (articles, editorials, debates, answers to readers’ letters) but in an imprecise form and as if by accident. They are an indication that our readers, just as much as we ourselves, feel the need for a clear theoretical base to which to relate our critical practice and its field, taking the two to be indivisible. ‘Programmes’ and ‘revolutionary’ plans and declarations tend to become an end in themselves, this is a trap we intend to avoid. Our objective is not to feflct upon what we ‘want’ (would like)to do, but upon what we are doing and what we can do, and this is impossible without an analysis of the present situation
WHERE?
a. First, our situation. Cashiers is a group of people working together; one of the results of our work appearing as a magazine. A magazine, that is to say, a particular product, involving a particular amount of work (on the part of those who write it, those who produce it and, indeed, those who read it). We do not close our eyes to the fact that a product of this nature is situated fairly and squarely inside the economic system of capitalist publishing (modes of production, spheres of circulation, etc.). in any case it is difficult to see how it could be otherwise today, unless one is led astray by Utopian ideas of working ‘parallel’ to the system. The first step in the latter approach is always the paradoxical one is setting up a false front, a ‘neo-system’ alongside the system from which one is attempting to escape, in the fond belief that it will be able to negate the system. In fact all it can do is reject it. (idealist purism)and consequently it is very soon jeopardized by the enemy upon which it modeled itself. This ‘parallelism’ works from one direction only. It touches only one side of the wound, whereas we believe that both sides have to be worked upon. And the danger of the parallels meeting al too speedily in infinity seems to us sufficient to argue that we had better stay in the finite and allow them to remain apart.
This assumed, the question is: what is our attitude to our situation? In France the majority of films, like the majority of books and magazines, are produced and distributed by the capitalist economic system and within the dominant ideology. Indeed, strictly speaking all are, whatever expedient they adopt to try and get around it. This being so, the question we have to ask is: which films, books, and magazines allow the ideology a free, unhampered passage, transmit it with crystal clarity, serve as its chosen language? And which attempt to make it turn back and reflect itself, intercept it, make it visible by revealing its mechanisms, by blocking them?
b. For the situation in which we are acting is the field of cinema (Cahiers is a film magazine), and the precise object of our study is the history of a film: how it is produced, manufactured, distributed, understood.
What is the film today? This is the relevant question; not, as it possibly once was: what is the cinema? We shall e to ask that again until a body of knowledge, of theory, has been evolved (a process to which we certainly intent to contribute) to inform what is at present an empty term, with a concept. For a film magazine the questions also: what work is to be done in the field constituted by films? And for Cahiers in particular: what is our specific function in this field? What is to distinguish us from other ‘film magazins’?
THE FILMS
What is a film? On the one hand it is a particular product, manufactured within a given system of economic relations, and involving labour (which appears to the capitalist as money)to produce-a condition to which even ‘ndependent’ film-makers and the ‘new cinema’ are subject- assembling a certain number of workers for this purpose (even the director, whether he is Moullet or oury, is in the last analysis only a film worker). It becomes transformed into a commodity, possessing exchange value, which is realized by the sale of tichets and contracts, and governed by the laws of the market. On the other hand, as a result of being a material product of the system, it is also an ideological product of the syste, which in France means capitalism.
No filmmaker can, by his own individual efforts, change the economic relations governing the manufacture and distribution of his films. (it cannot be pointed out too often that even filmmakers who wet out to be ‘revolutionary’ on the level of message and form cannot effect any swift or radical change in the economic system- deform it, yes, deflect it, but not negate it or seriously upset it structure. Godard’s recent statement to the effect that he wants to stop working in the ‘system takes no account of the fact that any other system is bound to be a reflection of the one he wishes to avoid. The money no longer comes from the Champs-Elysees but from London, Rome, or New York. The film may not be marketed by the distribution monopolies but it is shot on film stock from another monopoly- Kodak.) because every film is part of the economic system it is also a part of the ideological system, for ‘cinema’ and ‘art’ are branches of ideology. None can escape, somewhere, like pieces in a jigsaw, all have their own allotted place. The system is blind to its own nature, but in spite of that, indeed because of that, when all the pieces are fitted together they give a very clear picture. But this does not mean that every filmmaker plays a similar role. Reactions differ.
It is the job of criticism to see where they differ, and slowly, patiently, not expecting any magical transformations to take place at the wave of a slogan, to help change the ideology which conditions them.
A few points, which we shall return to in greater detail later: every film is political, inasmuch as it is determined by the ideology which produces it (or within which it is produced, which stems from the same thing). The cinema is all the more thoroughly and completely determined because unlike other arts or ideological systems its very manufacture mobilizes powerful economic forces in a way that the production of literature (which becomes the commodity ‘books’, does not- though once we reach the level of distribution, publicity, and sale, the two are in rather the same position).
Clearly, the cinema ‘reproduces’ reality: this is what a camera and film stock are for- so says the ideology. But the tools and techniques of filmmaking are a part of reality’ themselves; and furthermore ‘reality’ is nothing but an expression of the prevailing ideology. Seen in this light, the classic theory of cinema that the camera is an impartial instrument which grasps, or rather is impregnated by, the world in its ‘concrete reality’ is an eminently reactionary one. What the camera in fact registers is the vague, unformulated, untheorized, unthought-out world of the dominant ideology. Cinema is one of the languages through which the world communicates itself to itself. They constitute its ideology for they reproduce the world as it is experienced when filtered through the ideology. (as Althusser defines it, more precisely: ‘ideologies are perceived-accepted-suffered cultural objects, which work fundamentally on men by a process they do not understand. What men express in their ideologies is not their true relation to their conditions of existence, but how they react to their conditions of existence; which presupposes a real relationship and an imaginary relationship.) so, when we set out to make a film, from the very first shot, we are encumbered by the necessity of reproducing things not as they really are but as they appear when refracted through the ideology. This includes every stage in the process of production: subjects, ‘styles’, forms, meaning, narrative tradition; all underline the general ideological discourse. The film is ideology presenting itself to itself, talking to itself, learning about itself. Once we realize that is the nature of the system to turn the cinema into an instrument of ideology, we can see that the filmmaker’s first task is to show up the cinema’s so-called depiction of reality’ if he can do so there is a chance that we will be able to disrupt or possibly even sever the connection between the cinema and its ideological function.
The vital distinction between films today is whether they do this or whether they do not.
a.The first and largest category comprises those films which are imbued through and through with the dominant ideology in pure and unadulterated form, and give no indication that their makers were even aware of the fact. We are not just talking about so –called ‘commercial’ films. The majority of films in all categories are the unconscious instruments of the ideology which produces them. Whether the film is ‘commercial’ or ‘ambitious’, ‘modern’ or ‘traditional’, whether it is the type that gets shown in art houses, or in smart cinemas, whether it belongs to the ‘old’ cinema or the ’young’ cinema, it is most likely to be a re-hash of the same old ideology. For all films are commodities and therefore objects of trade, even those whose discourse is explicitly political- which is why a rigorous definition of what constitutes ‘political’ cinema is called for at this moment when it is being idely promoted. This merging of ideology and film is reflected in the first instance by the fact that audience demand and economic response have also been reduced to one and the same thing. In direct continuity with political practice, ideological practice reformulates the social need the backs it up with a discourse. This is not a hypothesis, but a scientifically established fact. The ideology is talking to itself; it has all the answers ready before it asks the questions. Certainly there is such a thing as public demand, but ‘what the public wants’ means’ what the dominant ideology wants’. The notion of a public and its tastes was created by the ideology to justify and perpetuate itself. And this public can only express itself via the thought-patterns of the ideology. The whole thing is a closed circuit, endlessly repeating the same illusion.
The situation is the same at the level of artistic form. These films totally accept the established system of depicting reality: ‘bourgeois realism’ and the whole conservative box of tricks: blind faith in ‘life’, ‘humanism’, ‘common sense’, etc. a blissful ignorance that there might be something wrong with this whole concept of ‘depiction’ appears to have reigned at every stage in their production, so much so, that to us it appears a more accurate gauge of pictures in the ‘commercial’ category than box-office returns. Nothing in these films jars against the ideology or the audience’s mystification by it. They are very reassuring for audiences for there is no difference between the ideology they meet every day and the ideology on the screen. It would be a useful complementary task for film critics to look into the way the ideological system and its products merge at all levels: to study the phenomenon whereby a film being shown to an audience becomes a monologue, in which the ideology talks to itself, by examining the success of films by, for instance, Melville, Oury, and Lelouch.
b. A second category is that of films which attack their ideological assimilation on two fronts. Firstly, by direct political action, on the level of the ‘signified’, that is they deal with a directly political subject. ‘deal with’ is here intended in an active sense: they do not just discuss an issue, reiterate it, paraphrase it, but use it to attack the ideology ( this presupposes a theoretical activity which is the direct opposite of the ideological one). This act only becomes politically effective if it is linked with a breaking down of the traditional way of depicting reality. On the level of form, Unreconciled, The Edge and Earth in Revolt all challenge the concept of ‘depiction’ and mark a break with the tradition embodying it.
We would stress that only action on both fronts, ‘signified’ and ‘signifiers’ has any hope of operating against the prevailing ideology. Economic/political and formal action have to be indissolubly wedded.
c. There is another category in which the same double action operates, but ‘against the grain’. The content is not explicitly political, but n some was becomes so through the criticism practiced on it through its form. To this category belong Mediterranee, the Belboy, Persona… For Cahiers these films (b and c) constitute the essential in the cinema, and should be the chief subject of the magazine.
d. Fourth case: those films, increasingly numerous today, which have an explicitly political content (Z is not the best example as its presentation of politics is unremittingly ideological from first to last; a better example would be Le Temps de Vivre) but which do not effectively criticize the ideological system in which they are embedded because they unquestioningly adopt its language and its imagery.
This makes it important for critics to examine the effectiveness of the political criticism intended by these films. Do they express, reinforce, strengthen the very thing they set out to denounce? Are they caught in the system they wish to break down…? (see a)
e. Five: films which seem at first sight to belong firmly within the ideology and to be completely under is sway, but which turn out to be so only in an ambiguous manner. For though they start from a nonprogressive standpoint, ranging from the frankly reactionary through the conciliatory to the mildly critical, they have been worked upon, and work, in such a real way that there is noticeable gap, a dislocation, between the starting point and the finished product. We disregard here the inconsistent-and unimportant- sector of films in which the director makes a conscious use of the prevailing ideology, but leaves it absolutely straight. The film we are talking about throw up obstacles in the way of the ideology, causing it to serve and get off course. The cinematic framework lets us see it, but also shows it up and denounces it. Looking at the framework one can see two moments in it: one holding it back within certain limits, one transgressing them. A internal criticism is taking place which cracks the film apart at the seam. If on e reads the film obliquely, looking for symptoms; if one looks beyond its apparent formal coherence, one can see that it is riddled with cracks: it is splitting under an internal tension which is simply not there in an ideologically innocuous film. The ideology thus becomes subordinate to the test. It no longer has an independent existence: it is presented by the film. This is the case in many Hollywood films, for example, which while being completely integrated in the system and ideology end up by partially dismantling the system from within. We must find out what makes it possible for a filmmaker to corrode the ideology by restating it in the terms of his film: if he sees his film simply as a blow in favor of liberalism , it will be recuperated instantly by the ideology; if on the other hand, he conceives and realizes it on the deeper level of imagery, there is a chance that it will turn out to be more disruptive. Not, of course, that he will be able to break the ideology itself, but simply its reflection in his film. (the films of Ford, dreyer, Rosselini, for example.)
our position with regard to this category of films is : that we have absolutely no intention of joining the current witch-hunt against them. They are the mythology of their own myths. They criticize themselves, even f no such intention is sritten into the scrip, and it is irrelevant and impertinent to do so for them. All we want to do is to show the process in action.
f. Films of the ‘live cinema’ (cinema direct) variety, group one (the larger of the two groups). These are films arising out of political (or, it would probably be more exact to say: social)events or reflections, but which make no clear differentiation between themselves and the nonpolitical cinema because they do not challenge the cinema’s traditional, ideologically conditioned method of ‘depiction’. For instance a miner’s strike will be filmed in the same style as Les Grandes Famlles. The makers of these films suffer under the primary and fundamental illusion that if they once break off the ideological filter of narrative traditions (dramaturgy, construction, domination of the component parts by a central idea, emphasis on forma beauty) reality will then yield itself up in its true form. The fact it that by doing so they only break off one filter, and no the most important one at that. For reality holds within itself no hidden kernel of self-understanding, of theory, of truth, like a stone inside a fruit. We have to manufacture those. (Marxism is very clear on this point, in its distinction between ‘real’ and ‘perceived’ objects.) compare Chiefs (Leacock) and a good number of the May films.
This is why supporters of cinema direct resort to the same idealist terminology to express its role and justify its successes as others use about products of the greatest artifice: ‘accuracy’, ‘a sense of lived experience’, ‘flashes of intense truth’, ‘moments caught live’, ‘ abolition of all sense that we are watching a film’ and finally: fascination. It is that magical notion of ‘seeing is understanding’: ideology goes on display to prevent itself from being shown up for what it really is, contemplates itself but does not criticize itself.
g. The other kind of ‘live cinema’. Here the director is not satisfied with the idea of the camera ‘seeing through appearances’, but attacks the basic problem of depiction by giving an active role to the concrete stuff of his film. It then becomes productive of meaning and is not just a passive receptacle for meaning produced outside it (in the ideoloty): L Regne du Jour, La Rentree des Usines Wonder.
CRITICAL FUNCTION
Such, then, s the field fo our critical activity: these films, within the ideology, and their different relations to it. From this precisely defined field spring four functions:1.in the case of the films in category a: show what they are blind to; how they are totally determined, moulded, by the ideology; 2.in the case of those in categories b,c and g, read them on two levels, showing how the films operate critically on the level of signified and signifiers; 3. In the case of those of types d.and f. show how the signified (political subject matter) is always weakened, rendered harmless, by the absence of technical/theoretical work on the signifier; 4. In the case of those in group e. point out the gap produced between film and ideology by the way the films work, and show how they work.
There can be no room in our critical practice either for speculation (commentary, interpretation, de-coding even) or for specious raving (of the film-columnist variety.) it must be a rigidly factual analysis of what governs the production of a film (economic circumstances, ideology, demand, and response) and the meanings and forms appearing in it, which are equally tangible.
The tradition of frivolous and evanescent writing on the cinema is as tenacious as it is prolific, and film analysis today is still massively predetermined by idealistic presuppositions. It wanders farther abroad today, but its method is still basically empirical. It has been through a necessary stage of going back to the material elements of a film, its signifying structure, its formal organization. The first steps here were undeniably taken by Andre Bazin, despite the contradictions that can be picked out in his articles. Then followed the approach based on structural linguistics (in which there are two basic traps, which we fell into- phenomenological positivism and mechanistic materialism). As surely as criticism had to go through this stage, it has to go beyond. To us, the only possible line of advance seems to be the use the theoretical writing of the Russian filmmakers of the twenties (Eisnstein above all) to elaborate and apply a critical theory of the cinema, a specific method of apprehending rigorously defined objects, in direct reference to the method of dialectical materialism.
It is hardly necessary to point out that we know that the ‘policy’ of a magazine cannot- indeed, should not-be corrected by magic overnight. We have to do it patiently, month by month, being careful in our own field to avoid the general error of putting faith in spontaneous change, or attempting to rush into a ‘revolution’ without the preparation to support it. To start proclaiming at this stage that the truth has been revealed to us would be like talking about ‘miracles’ or ‘conversion’. All we should do is to state what work is already in progress and publish articles which relate to it, either explicitly or implicitly.
We should indicate briefly how the various elements in the magazine fit into this perspective. The essential part of the work obviously takes place in the theoretical articles and the criticism. There is coming to be less and less of a difference between the two, because it is not our concern to add up the merits and defects of current films in the interests of topicality, nor, as on humorous article put it ‘to crack up the product’. The interviews, on the other hand, and also the ‘diary’ column and the list of films, with the dossiers and supplementary material for possible discussion later, are often stronger on information than theory. It is up to the reader to decide whether these pieces take up any critical stance, and if so what.
1969.
2009년 6월 3일 수요일
터미네이터 4 와 I'll be back

터미네이터 4를 봤다.
벌 써 4편 씩이나 이야기를 연결해서 이어가야 했다는 점에서, 아무리 상업영화라고 해도,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노고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 자막이 모두 끝날때까지 자리를 지켰는데, 크레딧이 올라가고 올라가고 결코 끝나지 않을 것 만큼의 이름들의 계속되었다. (그래서 배가 산으로 올라갔나?)
난 영화감상을 쓰려는 것이 아니다.
터미네이터라는 이름들의 영화들이 하나로 이어질 수 있는 연결고리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했다. 산발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을 내러티브의 구조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어떤 노력들을 했으며, 과연 이러한 노력들은 정당했는가? 그리고 그것들은 관객들은 그들이 의도했던 방식대로 관객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었는가? 여기서 연결고리가 있다면, 바로 I'll be back!이 아닐까 싶다.
I'll be back!
나는 이 짧은 한 문장이, 그것도 어눌하고 어색하기 짝이 없는 액센트가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것만 같은 이 한마디가, 영화 속에서 어떻게 이야기 구조를 지지해 줄 수 있는 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때는 꼭 근육질의 주지사가 나오시지 않아도 된다. 이미 우리의 뇌는 아주 친절하게 되어 있어서, 그 누가 말하든지, 그리고 그 상황이 아무리 연관성없는 설정이라하여도 , 오토매틱으로 그 목소리와 그 얼굴의 모습을 떠올리게 프로그램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난관을 거뜬히 이겨낼 수 있는 마스터 키인 것이다.
이 말 한마디라면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어지는 동시에, 이 간단한 문장속에 이 영화 네편들이 줄줄이 알감자들처럼 따라 올라오는 것이다.
4 편에서는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구도를 와해해보려는 노력의 흔적이 역력하다. 이 시대가 어쩌면 가장 확실한 구도를 요구하는 헐리웃에서 조차 이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경향에 편승하는 기류가 흐르고 있음이 감지된다. 죽음으로서 더욱 유명해진 우리의 조커를 보라. 고뇌하는 불확실한 조커를 이 시대가 요구하듯이, 그래서 터미네이터 역시 더이상 기계만으로 이루어져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스토리의 나약함은 굳이 논할 것은 없고, 구성요소들의 빈약함 역시 그러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피식웃음을 자아낼 수 있는 하나의 코드.
I'll be back!이 잠시나마, 그 영화에대한 비웃음을 , 코메디의 편안한 코드로 변형시킬 수 있었다.
이번 학기 중, '내러티브의 구조' 수업 속에서 , 매시간 우리는 영화속의 다양한 스토리 구조에 대한 공부를 한다.
재현성의 문제, 탈재현성의 문제....등등
하지만 우리는 매주 이루어지는 각각의 수업시간들 역시,
영화의 속편들을 하나의 큰 통일체로 묶을 수 있듯이, 하나의 거대한 내러티브의 구조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바로 서현석 교수님의 한마디가 있기 때문이다.
"....., 다시 말해서...."
아마도 이 한마디가 매시간 시간 존재하지 않는다면, 거대한 내러티브 구조가 각각의 수업속에서 완성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바로 개별의 수업들의 거대한 내러티브의 완성으로 개개인의 뇌속에 이미 프로그램화 되어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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