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장례행렬은 단순해 보이지만 절대로 단순하지 않고,
벌써 40년이나 지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요즘 나온 영화들보다도 더더욱 현대적이고 실험적이고
동시에 균형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감독 마츠모토 토시오는 일본의 ATG(저예산 독립 영화 지원단체)의 지원으로 만들어졌기에
흥행에 대한 압박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웠기에 이런 작품이 가능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이 작품을 보면서, 집중을 했던 부분은 이야기 구조다.
이 영화는 준이라는 게이와 다른 트랜스 젠더들 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영화속 이야기 전개는 관객으로 하여금 환상속으로의 몰입과 감정이입을 하게끔 유도하다가도,
자주 또하나의 영화속에서 연기, 혹은 인터뷰를 하고 있는 장면임을 보여주면서 끊임없는 거리두기를 시도한다.
주인공 준에게 갑자기 게이로서의 의견을 물으면서 다큐적인 성격을 드러내다가,
다시 영화속의 이야기 흐름을 따라가는 영화적 성격으로 이어지고,
다시 그렇게 몰입을 하다가 보면, 또다시 그것이 하나의 극속 연기였던 것처럼 액자구조인양
영화 밖으로 처절하게 내팽개쳐진다.
객관적으로 그 공간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마지막 부분의 가장 강렬하고 그로테스크한 눈 찌르는 장면에서도 이 공식은 마찬가지로 진행된다.
오히려 최고조에 달한다.
준이 자신의 운명을 깨닫고 마치 예언 되었던 것처럼 신화적으로 자신의 눈을 날카로운 칼라 찌를때,
갑자기 감독 자신이 화면에 침입하고 나타난다.
그리고 친절하게 (일본인 특유의 친절한 엑센트와 몸짓으로) 이 순간에 대해 부연설명 해준다.
'이 얼마나 코믹한 인생이냐면서.' 사실, 그러한 얘기를 들을 때까지만해도 그 말은 역설로 들렸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잔인한 장면을 코믹하다고 해석을 했을까..'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 이후부터는 마술처럼 그 장면이 코믹하게 보여지기 시작한다.
갑자기 양 눈이 찔려 피가 줄줄 흘리면서 밖으로 나가는 장면은 예외없이 코믹하게 되어버린것이다.
감독이 갑자기 예언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마지막 장면에서 환한 대낮에 주인공은 두 눈이 찔려 아무것도 보지도 못하며서
좀비처럼 길가에 서있고, 그를 둘러싼 많은 사람들은 꽤나 무신경한 듯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다.
참으로 코믹하고, 참신했다. 대단한 거리두기와 객관화다.
둘째로 이 영화에서 나의 관심을 사로 잡았던 부분은 주술적인 신화적인 상징들이었다.
게이바의 퀸이었던 전 주인이 주인공과의 경쟁에서 밀리면서 자살을 하고, 그는 흰 장미로 둘러싸인 침대에 누워있다.
나는 이 영화의 장미의 장례행렬이라는 점을 상기하면서
장미의 의미를 알고자 , 특히 흰장미의 의미를 찾아보고자 했지만, 딱히 큰소득은 없었다.
단지 옛날 아도니스라는 미소년은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의 사랑을 받고 있었는데, 이를 질투한 아프로디테의 남편
헤파이스토스는 멧돼지로 변해서 사냥을 하던 아도니스를 물어 죽였다.
이때 아도니스가 죽으면서 흘린 피에는 아네모네 꽃이 피었고 아프로디테의 눈물에서는 장미꽃이 피었다고 한다는 정도였다.
영화속에서 단서를 찾아한다면 게이바에 전주인었던 곤다가 생전에 가장 좋아했던 꽃이 흰 장미였고,
그래서 장례식에 참석했던 다른 트랜스 젠더들이 생화를 쓰지 못하고, 흰장미를 조화를 쓸 수 밖에 없었다고 한탄한다.
아마도 그랬나보다.
조화인 흰장미의 의미가 이 영화의 중심에 있는 것이다.
백색의 순결함과 성스러움등을 그렇게 소원했지만, 그들은 끝내 얻지 못한다.
죽어서까지도 자연스러움을 성취하지 못한채 조화라는, 생명없는 꽃으고 끝맺음을 한다.
한낱 소원으로만 그치는 인공 흰장미들의 장례행렬 말이다.
그래서 어쩌면 감독은 그것을 인공적으로 거리두기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의 게이주인공은
영화내내 아름다웠다가 결국에는 코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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