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 11일 목요일

jean-luc comolli

JEAN-LUC COMOLLI AND JEAN NARBONI
CINEMA/ IDEALOGY/ CRITICISM


방송영화전공 3학기
이현정



과학적 비평은 그 범위와 방법론을 명확히 규정해야만 한다.
이것은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상황에 대한 자각과 학문의 범위에 대한 엄격한 분석 그리고 작업을 필요하게 하면서, 조건들과 작업을 완수하기 위한 특별한 기능들을 함의하고 있다.
Cahiers du Cinema에서 우리는 우리의 입장과 목표에 대한 전세계적인 분석을 실시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완전 무의 상태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분석의 조각들은 최근의 우연적이고 막연한 상태의 우리의 출판물들 (기사, 논설, 토론, 독자에 대한 회답, 편지) 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것은 우리의 독자들도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둘로 나눌 수 없는 비판적 실천과 그것의 장을 연결시키는 명료한 이론적 토대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프로그램화와 혁명적인 계획들 그리고 선언들은 그 자체들로서 종국을 맞기가 쉽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함정을 피하려고 한다. 우리의 목표는 우리가 하고 하고자 하는 것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고 있는 것,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드러내는 것인데, 이것은 현재상황에 대한 분석 없이는 불가능한 것들이다.


어디에?

a. 첫 번째로 우리가 처해있는 장소이다. Cahiers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우리가 같이 하는 일의 결과 중 하나는 잡지를 통해서 보여진다. 잡지라는 특정한 생산물은 누군가 그것을 쓰고, 누군가 그것을 출판해 내고, 그리고 누군가는 그것을 읽게 되는 특정한 양의 노동과 관련이 되게 된다. 우리는 이런 상품의 본성이 자본주의 출판계의 경제 시스템 (출판 양식, 발행부수의 범위 등등)속에서 공명정대하게 위치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여하튼, 시스템에 평행하는 유토피아적인 사고들로 길을 읽지 않았다면, 오늘날 다른 방식을 가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후자의 접근에 있어서 첫 번째 단계는 시스템을 무효화시킬 수 있는 호의적인 믿음에서, 도피하고자 시도하는 것으로부터 같이 있는 새로운 시스템은 언제나 거짓 전선이다. 사실 이것이 할 수 있는 전부는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사실 할 수 있는 전부는 거부하는 것이다.
(이상주의자의 순수주의)와 결정적으로 머지않아 그 자체로 모델화되는 적들에 의해 위험에 처해지게 되는 것이다. 이 평행주의는 오직 한 방향으로만 작동된다. 우리는 양방향으로 작동해야 된다고 믿는 반면, 이것은 상처 입은 자의 한 방향만을 건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무한대에서의 고속의 평행선의 만남의 위험성은 우리에게 차라리 유한대에서 서로가 평형상태로를 인정하면서 유지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주장하는 듯 하다.
이렇게 가정 했을 때,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의 상황에서 우리의 태도는 무엇인가?
프랑스에서 영화의 대부분은 책이나 잡지에서처럼, 지배적인 이데올로기 안에서 자본주의 경제구조에 의해서 생산되고, 분배된다. 사실, 엄격히 말해서, 아무리 진취적인 것을 채택해서 시도한다고 해도, 우리는 다 이렇다.
이런 상태이므로, 우리가 물어야 하는 질문은 이것이다:
어떤 영화, 책, 그리고 잡지가 자유롭게, 방해 받지 않는 문장을 쓴 이데올로기를 허용하며, 투명하게 전달하고, 선택된 언어로서 작용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떠한 시도가 그것을 다시 되돌리고, 반성하고, 그것들을 막아 냄으로써, 그 메카니즘을 '폭로해서 분명히 눈에 보이도록 할 수 있을까?
b.우리가 연기하고 있는 장소는 영화의 장이다.
(Cahiers는 영화잡지), 그리고 우리 연구의 분명한 목적은 영화의 역사이다. 그것이 어떻게 기획되고, 제조되며, 배분되고, 이해되는가 말이다. 오늘날의 영화는 무엇인가? 이것은 적절한 질문이다;
아니다. 전에 그랬을 법하게도: 영화는 과연 시네마는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이론과 지식의 실체가 현재의 공허한 개념과 말들을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해 진화해 나갈때까지 이론의 실체, 지식의 실체에 대해서 질문을 던질 수 없을 것이다.
영화잡지로서 질문은 역시 이것이다: 어떤 일들이 영화로 구성된 범위들에서 행해져야 하는가?
그리고 특히 Cahiers로서는: 이 부분에서 우리의 특별히 해야 하는 기능은 무엇인가?
우리를 다른 잡지와 구별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영화들.

영화는 무엇인가? 한편으로는 이것은 특별한 상품인데, 주어진 경제관계 시스템 속에서, 자본주의자에게는 돈으로 이해되는 생산하기 위한 노동과 연관 지어서 제조되고 있다. 이런 상황은 독립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던가, 'new cinema'를 지향하는 사람들 조차 똑같은 목적을 위해 특정한 수의 노동자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이것은 감독에게조차, 그가 Moullet던지 Oury던지 상관없이 영화노동자 분석의 마지막 단계로 적용된다.)
이것은 시장의 법칙에 의해 좌우되는 매표 수입이나, 계약 등의 교환가치를 지니고 있는 상품으로 변형이 된다. 다른 한편, 이런 시스템 속의 물질적 상품화의 결과로서, 이것은 또한 시스템상의 이데올로기적이 상품화가 되는 것이다.
프랑스의 경우 그것은 자본주의를 뜻하는 것이다.
어떤 영화관계자라도, 단지 자신의 개인적인 노력으로, 그의 영화의 생산과 분배를 관장하는 경제관계를 바꿀 수 있을 수는 없다. (내용과 형식상으로 혁명적인 영화로서 출발한 영화감독이 랄지라도 경제구조상의 순식간의 변화나 급진적인 변혁을 가져올 수는 없다는 것은 여러 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물론 훼손시키거나, 편향시킬지는 몰라도 그것을 무효화시거나, 그것의 구조자체를 심각하게 전복시킬 수는 없다. 고다르가 최근 자신은 이러한 구조 속에서 일하기를 그만두고 싶다고 언급한 것은 그 어떤 조직도 그가 피하기를 원했던 것들의 투영이라는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자금은 더 이상 프랑스에서 조달되지 않는다고 해도 영국, 이태리, 미국 등이 그것을 맡게 된다. 영화가 더 이상 독점적인 배급에 의해 시장에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또 다른 독점인 코닥의 필름으로 영화를 찍는 것이다. ) 왜냐하면 모든 영화는 경제시스템의 일부분일 수 밖에 없고, 영화와 예술이 이데올로기 상의 하나의 가지들이기에, 이데올로기의 시스템 안의 일부분일 수 밖에 없다. 어느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고, 마치 퍼즐조각들처럼 어디선가 할당된 일부분의 몫이 있는 것이다. 이 시스템은 그 본질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아니 사실은 그러한 이유 때문에 이 모든 조각들이 다 맞춰졌을 때는 그림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한 모든 영화감독들이 다 똑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반응들은 각기 다르다.
아무리 그들을 조건 짓고 있는 이데올로기 자체를 바꾼다고 슬로건들을 내세운 속에서 그 어떤 마술적인 변혁을 기대하지 않으면서 천천히,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것이 바로 비평의 해야 할 일인 것이다.
내가 나중에 다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몇 가지를 집고 넘어가자면: 모든 영화는 정치적이고, 그것을 생산해내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결정이 된다. (아니면, 그곳에서 이데올로기가 생성되든지, 그 줄기는 같은 것이다.) 영화는 더더욱 철저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결정되어 있는데, 왜냐하면 다른 예술들이나 이데올로기 시스템과는 달리 문학을 출판하듯이 이것은 강력한 경제영향력을 결집시키기 때문이다. (책이라는 상품이 되기까지 유통과, 광고, 그리고 판매의 단계에 이르기까지 이 둘은 같은 역할을 한다.) 확실히, 영화는 현실을 복제하고 잇다: 이것은 카메라와 필름 뭉치가 이데올로기를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영화 만들기에 있어, 도구들과 기술들은 그 자체의 현실의 일부분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현실이란 지배 이데올로기의 표현에 불과하지 않다.
이렇게 볼 때, 전통적인 영화이론들, 즉, 카메라는 세상이라는 구체적인 현실의 세계를 이해하고,
혹은 거기에 스며들게 하는 공명정대한 기구라는 견해는 상당히 반동적인 것이다. 사실 카메라가 잡아내는 것은 막연하고, 공식화되지 않고, 이론화되지 않고, 생각이 없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세계인 것이다.
카메라는 세상이 그 자체와 소통하는 하나의 언어인 셈이다.
그들은 그것들의 이데올로기를 구성해내는데, 이데올로기에 의해 걸러진 후에 그것이 경험되는 세상 그대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좀더 자세히 알튀세르가 정의하듯이, 이데올로기란 지각되고, 받아들여지고, 문화적인 대상들로 인해 고통을 겪게 된다. 이런 과정은 근본적으로 인간에게 영향을 끼치지만, 그들은 이 과정을 깨닫지 못한다. 인간이 이데올로기 속에서 표현하는 것은 그들 존재에 대한 진실된 관계성이 아니라, 어떻게 존재의 조건에 대해서 반응하느냐인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관계와 상상 속의 관계에 대한 전제 조건인 셈이다.) 그래서, 우리가 영화를 만든다고 할 때, 그 첫 번째 샷부터 우리는 사물 재현의 요구는 방해를 받게 되는데, 그것은 그 존재 자체로서의 재현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에 의해 굴절된 상으로의 재현을 말하게 된다.
이것은 제작의 모든 단계에서 나타난다: 주제, '스타일', 형식, 의미, 스토리전개 전통;
모든 것이 일반적인 이데올로기 담론을 강화하고 있다. 영화는 그 자체에서 자체로 드러나고, 말하고, 그 자체에 대해 배우는 이데올로기이다. 우리가 일단 영화를 이데올로기의 도구로서 전화시키는 시스템의 본질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영화감독의 제일 임무가 영화의 소위 말하는, 현실의 재현이라는 것을 드러내 보이고, 그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가 영화와 이데올로기 기능간의 관계를 분열시키고, 가능하면 절단시킬 수 있는 기회가 일을 것이다. 오늘날 가장 중요한 영화의 기능은 그들이 이것을 하느냐, 아니면 하지 않느냐에 있는 것이다.
a. 첫 번째이면서도 가장 거대한 범주는 철저하게 지배 이데올로기에 물들어 있는데 그 방식이 너무도 깨끗하고 순수한 형태여서, 영화 제작자들 조차도 그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영화들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단순히 소위 '상업'영화만을 일컫지 않는다. 모든 범주에 있어서 대부분의 영화들이 그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자각하지 않지만 도구이다. 그 영화가 상업적이든, 야심작이든, 현대적이든, 전통적이든, 예술극장에서 상영되든, 작은 영화관이든, 고전영화에 속하든지, 젊은 영화에 속하든지, 거의 대부분이 다 똑같은 이데올로기를 비벼놓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모든 영화가 상품이고 그래서 교환의 대상이며, 그들의 담론이 숨김없이 정치적이다,
이것이 왜 대대적으로 홍보가 되었을 때 정치적 영화가 되기 위한 철저한 정의가 요구되는 이유이다. 이데올로기와 영화의 합병은 관객과 경제적인 반응이 한가지로 그것도 같은 것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반영된다. 직접적인 정치적 실습과의 연속성에서, 이데올로기 실습은 담론으로 강화되는 사회적 요구를 재정비하게 된다.
이것은 가설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확립된 사실이다. 이데올로기는 그 자체에게 말을 한다;
이것은 질문을 하기도 전에 이미 모든 해답을 가지고 있다. 확실이 대중의 요구와 같은 것들이 있긴 하지만, 그러나 대중이 원하는 것'이라는 것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원하는 것이란 의미인 것이다. 대중과, 대중이 원하는 것이란 개념은 이데올로기가 그것을 합리화하고 그것을 영속시키기 위해 창조해낸 것이다. 그리고 대중은 오직 이데올로기의 양식화된 사고를 통해서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폐쇄회로로, 끊임없이 똑같은 환상을 반복해 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예술적 형태의 단계에서도 똑같다.
이 영화는 완전히 현실을 묘사하는 확립된 체계만을 받아들인다: '브르조아 사실주의' 그리고 보수적인 계략들의 합: 생명, 인간성, 상식 등의 맹목적인 믿음들, 축복받은 무식함 즉, 모든 단계의 생산의 단계에서 나타나는 묘사의 개념이 어딘가 잘못되었을 것이라는 그래서, 우리한테는 매표소의 판매수익보다는 상업적이라는 개념이 더욱더 영화에 있어서 측정기준이 되는 것이다. 어떤 영화도 이데올로기에 반해서, 혹은 관객의 신비화에 반해서 삐걱거릴 수 없다. 관객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일상생활의 이데올로기와 영화 스크린 상에 나타난 이데올로기와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참으로 안심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영화 평론가에게는 이데올로기 시스템과 그것의 상품이 하나로 통합되는 것을 보는 것은 상호 보완적으로 유용한 것이다. 어찌하여 영화 관객에게 독백이 되는지, 예를 들어 Melville, Oury, Lelouch와 같은 감독의 성공적인 영화를 살펴보더라도 이데올로기가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것을 공부하는 것은 중요하다.
b. 두 번째 담론은 그 자신의 이데올로기 동화를 두 가지 측면에서 공격하는 영화들이다.
첫 번째로 직접적인 정치적 행동에 의해, '기의'의 단계에서, 그들은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주제들을 다룬다. '다룬다'라는 말은 여기에서 능동의 의미이다: 그들은 단순히 이슈를 토론하고, 반복하고, 부연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를 공격하기 위해 사용한다.(이것은 이데올로기적인 행동의 정반대인 이론적인 행동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러한 행동은 이것이 전통적인 현실의 재현방식을 파괴하는 것과 연관 있을 경우에만 정치적으로 효과가 있게 된다. 형식의 단계에서는, 화해되지 않고, The Edge and Earth in Revolt, 묘사에 대한 개념에 대한 저항과 그것을 구체화하는 전통에 대한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양측의 행동, 즉 '기표'와 '기의'만이 만연해 있는 이데올로기에 저항해서 작동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경제/정치적이고 공식적인 행동이 결합되어야 한다.
c. ,가익보단 이중작동의, 또 하나의 담론이 있는데, 이것은 방식이 거슬러서 반대로 작동한다.
그 내용은 명백하게 정치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너무 철저해 비평이 이 형식을 통해서 작동되고 있다. 이 범주에 Mediterranee, the Belboy, Persona..등이 속해 있는 것이다.
Cahiers에게는 영화작품들은 (b와c)는 영화에 필수적이고 잡지의 주요 주제가 되어야 한다.
d. 네 번째의 경우: 이 영화들은, 요즘 들어서 많이 들어나고 있는, 명백하게 정치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z는 마치 청치학의 재현이 처음부터 끝까지 끊임없이 이데올로기적인 것처럼 최고의 예가 아니다; 좀 더 나은 예가 Le Temps de Vivre가 될 것이다.) 그러나 효과적으로 그 자신이 속해 있는 이데올로기 시스템을 비판하고 있지 못한다. 왜냐하면 물을 필요도 없이 그것의 언어와 이미지가 그 이데올로기 속에 깊숙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비평가에게 이런 영화들의 의도된 정치적 비판의 효과성을 검증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 되게 하였다. 그들이 자신들이 비난하려고 했던 것들을 오히려 표현하고, 보충하고, 강화하였는가? (a를 보라)
e. 다섯번 째: 처음에 보기에는 확실이 이데올로기 안에 속해 있는 것 같고 그 통치 안에 있는 것 같은 영화가, 그러나 단지 애매한 방식으로 그랬던 것이 밝혀지는 영화가 있다. 이것들은 처음에는 온건하게 비판하는 회유적인 솔직한 반동인, 혁신적이지 않은 관점에서 출발했지만 계속 꾸준히 작업을 해서, 시작점과 끝점 사이에 엄청난 전위와 눈에 띨 정도의 간극이 있는 것들이다.
우리는 일관되지 않고, 중요하지 않은, 감독이 지배 이데올로기를 의식적으로 사용하고, 그러나 절대적으로 직설적으로 말하는 영화는 무시한다. 우리가 말하는 영화는 그것에 봉사하고 코스를 이탈하게 하는 이데올로기에 반해서 방해물을 던져버리는 것이다.
영화적인 틀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보게 하지만, 또한 그것을 보여 줌으로서 규탄하는 것이다. 두 가지의 순간들이 들어있는 틀을 살펴보자:
하나는 어느 정도의 제한 안에서 하나는 그것을 지니고 있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거스르는 것이다.내적 비판은 솔기부분에서 영화의 갈라짐이 일어난다. 어떤 사람이 증상들을 찾으며, 영화를 삐딱하게 본다면 그 사람은 이것이 갈라진 틈 투성이 인 것을 볼 것이다: 이데올로기 적으로 아무 해가 없는 영화 속에서 있지도 않은 내적 긴장감으로 분리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데올로기는 이 테스트에 점점 종속되는 것이다. 더 이상 존재에 독립적이지 못한다:
그것은 영화에 의해 재현이 된다. 이것은 바로 많은 헐리웃 영화들의 상황이다. 예를 들어 시스템과 이데올로기가 완벽하게 통합되었지만 결국 부분적으로 속에서부터 시스템이 와해되는 것이다.
우리는 영화감독들이 그의 영화의 언어로서 다시 재현함으로써 이데올로기를 부식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그가 단순히 그의 영화를 자유주의 편향의 주먹 한방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이데올로기의 의해 즉시 만회하고 말 것이다; 그 반면에, 그가 그것을 이미지의 더 깊은 단계까지 생각하고 깨닫는다면 그것은 더욱 파괴적인 힘이 될 가능성이 있다. 물론 그가 이데올로기 자체를 깨뜨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단순히 그의 영화 속에서 반영할 수는 있다. (Ford, Dreyer, Rosselini의 영화와 같은 예에서처럼.) 영화의 범주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우리는 절대적으로 작금의 마녀사냥에 동조하고 싶은 의도는 없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믿음에 대한 신화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비판하고, 물론 그런 것이 글로써 쓰여질 의도는 없지만, 그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은 부적절하고 주제넘은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작동되고 있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f. 'live cinema'(cinema direct)라고 불리는 영화 종류, 그룹 (하나의 큰 그룹이나 두 개의 그룹들).
이들은 정치적 이벤트나 반성으로부터 나왔는데, 그들과 비정치적인 영화와의 명확한 구분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화의 전통적인 이데올로기적으로 조작된 재현의 방식에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광부들의 투쟁은 Les Grandes Familles의 스타일과 같이 찍을 것이다. 이런 영화들의 감독들은 마치 그들이 내러티브 전통의 이데올로기적인 필터를 제거해버리면 현실자체가 진실된 형식으로 굴복할 것이라는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환상들에 사로 잡혀 있다.
(공적인 아름다움에 강조점을 둔, 중심 생각으로 구성된 지배적인 생각들, 연출기법이나 건축양식)
사실 그렇게 함으로써, 오직 하나의 필터는 제거 할 수 있지만, 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안된다. 현실은 그 안에 이론과 진실의 자기 인식의 숨겨진 핵을 마치 과일 속에 들어있는 돌과 같이 가지고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현실'과 '인지된'사물간의 구별에서 이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Leacock의 Chief와 the May films의 a good number를 비교해 보라.
이것은 왜 시네마 디렉트의 옹호자들이 그의 역할을 표현하기 위해서, 마치 다른 사람들이 위해 기술의 생산품에 대해서 사용하듯이 그것의 성공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똑같은 이상주의적인 용어들을 사용하는가의 이유이다. :
'정밀함', '삶의 경험에 대한 느낌', '강한 진실의 섬광','생생한 순간들''우리가 영화를 보고 있는 느낌의 폐기'그리고 마지막으로: 환상.
이것은 '보는 것이 이해하는 것이다'라는 마술적인 개념이다: 이데올로기는 그 자체가 진실로 무엇인지가 드러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을 비난하지 않게 단순히 응시하게끔 펼쳐 보여준다.
g. 'live cinema'의 다른 종류. 여기 '외면을 통해 보는 것'이 카메라라는 생각에 만족하지 않는 감독이 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영화 속의 구체적인 물건들에 능동적인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기본적인 묘사의 문제를 공격한다. 그럼으로써 이것은 생산적인 의미가 되고, (이데올로기) 외부에서 생산되는 의미의 수동적인 저장소가 아니게 된다.
:Le Regne du Jour, La Rentree des Usines Wonder


비평적 기능

그러면, 우리의 비병적인 작업의 분야:
이데올로기 안에서 이런 영화들, 그리고 그들의 그것과의 다른 관계들. 여기서부터 정확하게 정의된 분야가 네 가지 기능으로 나온다:
1. 범주 a의 경우: 그들의 맹목적인 분야를 드러내라; 어떻게 그들이 이데올로기에 의해 완전히 결정되었고, 틀이 잡혔는지에 대해서;
2. 범주 b, c 그리고 g의 경우 두 가지의 단계로 읽고, 기표와 기의의 단계에서 어떻게 중심적으로 기능을 하고 있는지 드러내라.
3. 범주 d와 f의 경우 기표에 대한 기술적이고 이론적인 작업이 부재되었을 경우, 기의(정치적인 주제들)가 항상 약화되고, 무해하게 되는지를 보여라.
4. 그룹 e의 경우 영화와 영화가 작동하는 방식에 의한 이데올로기에 의해 생성되는 간극을 지적하고, 그것들의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라.
(논평, 해설, 해독) 고찰이든가, 방대한 헛소리들 (영화 칼럼류와 같은)에는 우리의 비평을 수행을 여유가 없다. 그것은 영화제작을 주관하는 엄격한 사실분석일 것이다.
손에 잡힐 듯한 또 하나의 요소인, (경제적 상황, 이데올로기, 요구 그리고 반응) 그리고 그 속에 나타나는 의미들과 형태들에 대한 분석이다. 변덕스럽고 곧 사라질 영화에 대한 글쓰기의 전통은 그것이 많은 것뿐만 아니라 끈질기기까지 하다.
그리고 오늘날의 영화분석은 아직도 대부분 이상주의적 전제들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다. 이들은 오늘날 더 나아가 떠돌아 다니는데, 그러나 아직도 기본적으로 이 방식은 경험주의적이다. 이것은 영화의 기표적인 구조, 이것의 형식적인 조직이라는 물질적인 요소들로 돌아가는 기초적인 단계를 통해왔다.
이것의 첫 번째 단계는 자신의 글에서 그에 대해 반대되는 글들이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부정할 수 없이 앙드레 바쟁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구조주의적 언어학을 기본으로 하는 접근방식을 따른다. (거기에는 우리가 빠지는 두 가지 기본적인 덫이 있는데,그 중 하나가 현상학적인 실증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기계적인 유물론이다.) 비평이 이 단계를 넘어서게 되면, 그 다음 단계로 가야 된다.
우리에게는 진보의 유일한 가능한 선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직접적인 참조가 되는, 규정하는 대상들을 엄밀하게 이해하는 하나의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그 중에서도 아이젠슈타인 ) 영화의 비평적 이론, 즉, 20년대 러시아 감독들의 이론적 저작들을 이용하는 것이다. 마법에 의해 하룻밤 만에 매거진의 정책이 교정이 될 수도, 되어서도 안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우리는 몇 달이든, 인내심을 갖고, 임의적인 변화에 믿음을 싣는 일반적 오류를 피하기 위해 그리고, 준비도 되지 않은 채 혁명으로 성급히 돌진을 시도하는 것을 조심을 해야 한다.
이 단계에서 진실이 우리에게 드러났다고 주장하기 시작하는 것은 '기적'이나, '개심'을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어떤 작업이 진행 중이며, 그것과 관련이 되어있는 글들을 그것이, 명백하든지, 함축적이든지 간에 출판하는 것이다. 우리는 간단히 어떻게 잡지의 다양한 요소들이 이 관점에 맞아떨어지는 지 알려야 한다.
이 일의 가장 중요한 분야는 분명히 이론적 기사들과 비평에 있다.
요즘에는 이 둘간의 간격이 점점 좁아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우리의 관심이 요즘 영화의 장단점을 부풀리는데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유머 있는 기사에서 '제품을 웃겨 뒤집어버려라' 하고 쓰듯이, 그것이 화제거리가 되는 것에 대한 관심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인터뷰와 영화의 제목과 일기형식의 칼럼은 서류와 나중에 가능하면 토의할 때 서류들과 보충 자료들과 함께, 자주 이론보다 정보 면에서 더 강하다.
이것은 어떤 비평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지 아닌지, 그렇다면 이유는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독자에게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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